조선시대 사관과 실록 by 연성재거사

과장이 좀 심한 표현이지만, 조선에게 "기록의 나라"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게 해 준 기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이하 『실록』으로 약칭) 흔히 "사관"이라고 하면 전문적으로 기록을 작성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관원들이 실록의 저본이 되는 사초史草를 작성했던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관직제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겸직兼職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서 전체가 겸직관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있는데, 실록의 편찬에서 핵심이 되는 춘추관春秋官도 모두 겸직으로 채워진 부서였다. 『경국대전』에 편제된 춘추관의 관원들은 다음과 같다.

정1품 영사領事 1명(영의정), 감사監事 2명(좌/우의정)
정2품 지사知事 1명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
정3품 수찬관修撰官
정3품 편수관編修官
종3품 편수관
정4품 편수관
종4품 편수관
정5품 기주관記注官
종5품 기주관
정6품 기사관記事官
종6품 기사관
정7품 기사관
종7품 기사관
정8품 기사관
정9품 기사관

『경국대전』에 의하면 춘추관의 관원들은 모두 문관을 쓰되 다른 직무를 맡고 있는 관리들에게 겸임을 시킨다. 여기서 수찬관(정3품 당상관) 이하는 승정원의 관리들,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의정부의 사인舍人·검상檢詳과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 세자시강원의 당하관 2명, 사헌부의 집의 이하, 사간원·승문원·종부시·6조의 당하관이 각각 겸임한다고 되어 있다.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춘추관의 일을 맡는 관원 수를 계산하면 우선 전원이 춘추관직을 겸하는 홍문관(20명)에, 의정부의 사인과 검상(3명), 승문원의 승지(6명)와 주서(2명), 예문관 봉교 이하(8명), 세자시강원 당하관(2명), 사헌부의 집의~지평(5명)에 사간원·승문원·종부시·6조의 당하관(도합 10명)을 더하면 모두 36명이 된다. 실록에서 흔히 사관史官이라고 했을 때 가리키는 대상은 춘추관의 일을 겸하고 있는 춘추관의 겸직자[兼春秋]들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그래서 여러 사관[諸史官], 사신史臣이라고도 통칭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왕과 함께 자리에 들어가 회의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이 중에서도 따로 있다. 이 사관들은 원래 다른 관청의 직책을 맡고 있지만, 사실상 전임사관專任史官으로 간주되었던 존재들이다. 춘추관의 일을 겸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문관의 봉교 이하, 즉 정7품 봉교奉敎 2명, 정8품 대교待敎 2명, 정9품 검열檢閱 4명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왕의 좌우에 입시하여 기록할 임무를 맡은 전임사관으로, 흔히 한림翰林이라고 통칭되었다. 이들은 좁은 의미[狹義]의 사관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임사관은 바로 이 한림들이다.

왕의 죽고 나서 실록을 만들 때 주된 자료는 2종이다. 하나는 시정기時政記로, 이것은 여타 겸임사관들이 각 부서의 일을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한다. 즉, 각 부서에 퍼진 겸임사관[兼史職者]들이 시정時政을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면 이것을 바탕으로 시정기를 편찬하는 것이다. 이 사료는 한림들이 왕과 함께 입시入侍하여 작성하는 사초인 입시사초入時史草와 더불어 춘추관에 올려진다.
이것 말고도 전임사관들은 가장사초家藏史草를 작성하여 제출할 수 있었다. 사관의 임무는 직필直筆이기에 이를 보장하기 위해 집에서 사초를 작성하고 사후에 제출하는 형식을 허락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집에서 보관하는 사초인 것이다. 대신 그만큼 사초를 작성한 당사자가 책임을 지는 부분도 많았다. 이러한 사초들은 대개 비밀스런 사무를 기록한 것들이 많다보니 실록편찬 시 기한 내에 납부해야 했다. 그리고 사론史論을 쓰는 경우, 사료를 제출할 때 서명을 해야 했다.
이런 사초들은 대개 한 번 작성되고 나면 다시 고쳐쓸 수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 실록을 편찬할 때도 사초의 내용들은 기재 여부만 검토해서 수록하는 것이지, 사초의 내용을 고쳐서 실록을 편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름이 적히다보니 위험부담감을 느낀 사관들이 간혹 사초를 고치는 경우도 간간히 있었다.-_-(물론 알짤없이 엄형에 처해졌다)

우리는 흔히 조선의 사관제도를 이야기하면서 직필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실상은 사실상 사관직이 전부 겸직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사관들의 업무가 침해를 받거나 역사 기록이 누적되어 공정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려고 한 것에 더 가깝다.
사실, 본 포스팅에서는 『경국대전』 시스템 내에서 사관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에 의해 쓰여지는 사초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만 간략하게 다루었다. 조선의 사관 제도는 태조 때부터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고, 그 뒤에도 정치성/사상적 배경에 따라 사관의 위상과 역할이 변동되어 왔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차후에 시간이 되면 이야기하려고 한다.

막짤은 늘 그랬듯이 케이로 마무리 ㄳ

덧글

  • Gull_river 2018/06/08 00:22 #

    사관은 사초를 고치면 엄형을 받는데,
    거사님은 최애돌을 고치셨으면서도...(후략)
  • 위장효과 2018/06/08 10:23 #

    그러면서도 "존중입니다. 취향해주시죠?"라고 적반하장을 시전...(후략)
  • 漁夫 2018/06/10 01:20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연성재거사 2018/06/10 17:01 #

    이 위로 전부 숙청!!!!
  • 위장효과 2018/06/08 10:29 #

    1. 사신은 논한다. 홍문관 수찬 연성재가 최애돌을 함부로 고치고도 이를 참람되게 드러내니 참으로 괴이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2. 한림이란 명칭은 어째 한림원에서 온 거 같기도 한데, 한림원은 국왕의 조서를 작성하는 관청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뭔가 재미있기도 하고요-승문원이나 뭣보다도 예문관의 주 업무가 뭐 였나 생각하면 맞는 호칭같기도 하고 말이죠^^

    3. 일단 사초에 기록한 건 검토후 올리지 고치지는 않는다...이래서 황희가 안 한 짓거리가 실록에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졌지...흠...
  • 연성재거사 2018/06/10 17:02 #

    1. 사관은 논한다. 자고로 시세가 덕질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거스르는 자야 말로 사문난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그 한림에서 온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전업사관이기 전에 승문원 관원인 만큼 승지와 함께 왕의 업무를 보좌하기도 합니다.

    3. 그리고 영원히 고통받는 황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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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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