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일부) by 연성재거사

제 2차 세계대전의 무대는 넓었고, 처절했다. 그중에서도 태평양의 전투는 치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군과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의 섬들을 놓고 혈전을 벌였다.
이 혈전에 참전했던 병사들 몇몇은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중 한명이 유진 슬레지(Eugene Sledge. 1923~2001)였다. 그는 원래 장교과정으로 해병대에 지원했지만 낙제하면서 일반병과 M2 60mm 박격포로 특기를 받아 훈련을 받았고, 펠렐리우 섬과 오키나와 섬에서 벌어진 격전에 참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HBO 미니시리즈 <퍼시픽(The Paciffic)>에서도 그려지고 있다. 조셉 마젤로가 슬레지 역을 열연했다. 사진은 Part.9 오키나와 전투 편의 한 장면

유진 슬레지의 실제 사진. 1946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찍은 사진

전쟁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1960년 플로리다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62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앨라배마 주 몬테발로 대학에서 생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의 유진 슬레지

만년의 유진 슬레지

그는 참전시기에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모를 남겼는데, 그는 결국 이 메모를 바탕으로 참전 회고록 『오랜 전우들과 함께-펠렐리우와 오키나와에서(With the Old Breed-At Peleliu and Okinawa)』를 1981년 출간했다. 원래는 가족들에게 전쟁의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썼던 것인데, 아내의 권유로 출간하게 되었다.
현재 이 책은 지휘관이 아닌, 일반 사병이 쓴 2차 세계대전 참전 회고록 중에서도 가장 잘 쓰여진 축에 속한다. 미니시리즈 <퍼시픽>을 보고나서 호기심이 들어 구해 읽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옮겨보았다. 상당히 끔찍한 내용이 일부 있기 때문에, 심장이나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조용히 넘어가길 바란다. 번역저본은 2007년 Presidio Press 판본이다.

이 글을 씀으로써 나는 오랫동안 해병대 1사단 동료들에게 느꼈던 의무를 다했다. 그들 모두는 우리 조국을 위해 너무도 큰 고통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아무탈 없이 나오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고, 그들의 건강을 바쳤으며, 몇몇은 그들의 정신을 바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잊고 싶어하는 공포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받으면서도 의무를 수행하여, 그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가 안주하는 조국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이 해병대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Introduction xxvi~xxvii)

"해이니 중사님, 펠렐리우 전투는 어땠습니까?" 나는 물었다. 나는 내가 참전한 첫 전투에 대해 1차 세계대전의 몇몇 큰 전투를 포함한 전투경력을 가진 베태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내 경험에서는 펠렐리우와 비교할 만한 것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숙련된 전사의 말-가령 "그 전투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구만, 너는 오래된 부대에 있었어야 해"와 같은- 대신, 해이니는 예상하지 못한 답을 했다. "이봐, 그것은 끔찍했어. 나는 그런 전투는 전혀 보지 못했어. 난 이제 고국에 돌아갈 준비가 되었어. 난 그 전투 이후 진절머리가 나."
......(중략).....
우리 중 아무도 우리가 (전투를) 겪기 전과 같지 않았다. 물론,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의 체험이 그렇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펠렐리우에서 죽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신앙처럼 받아들여졌던 아이같은 순진함이었을 것이다. 아마 나는 전쟁의 야만성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높은 곳에 있는 정치인들이 실책하고 다른 사람을 (전쟁의 야만성을) 견디도록 (전장에) 보내는 것을 결코 멈출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한 펠렐리우에서 중요한 것을 배웠다. 동료에게 의지하는 인간의 능력과 즉각적인 리더십은 전적으로 필수적이다. 나는 우리의 규율, 단결심, 고된 훈련이 신체적, 정신적 시련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나를 무장시켜준 요소들이었다고 생각한다-물론 엄청난 행운이 뒤따랐지만. 나는 또한 사실성을 배웠다. 일본군처럼 강하고 헌신적인 적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와 같이 강해져야 했다. 그들이 천황에게 헌신적인 것처럼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미국에 헌신적이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2차 세계대전 시기 미 해병대 신조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사가 이러한 신조를 입증해준다.
(p.170~171)

동이 트기 직전에, 우리는 적군 수류탄 2발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길 건너에 배치되어 계곡바깥의 앞쪽을 겨누고 있던 우리의 37mm 대포가 참호를 파고 배치된 곳에서 일본군이 소리지르고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총소리가 울렸고, 절박한 외침과 욕지거리가 들렸다.
"의무병!"
그리고 조용해졌다. 최근 우리와 합류한 새로운 의무병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났던 쪽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의무병. 내가 같이 가겠어."
나는 용감무쌍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상당히 두려웠다. 하지만 적군의 기만하는 경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가 그와 동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략)......
나는 톰슨 기관단총을 붙잡고 의무병을 따라갔다. 내가 갔을 때 그는 마침 37mm 포수인 부상당한 해병에게 붕대를 다 감아준 참이었다. 다른 해병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보러 왔다. 두 명의 적군 장교가 급경사를 기어올라 포가 배치된 곳에 수류탄을 던지고 일본도를 휘두르며 뛰어들었고, 여러명이 부상을 당했다. 해병 한 명이 카빈 소총으로 일본도 공격을 막았다. 그의 동료가 일본군 장교를 쏘아 조금 떨어진 경사에 뒤로 넘어뜨렸다. 일본도 공격은 손가락을 자르고 적갈색 카빈을 총열덮개부터 총신까지 갈라놓았다.
두 번째 일본군 장교는 37mm 포의 바퀴 옆에 등을 기댄 채 누워 죽어있었다. 그는 흰 장갑, 빛나는 가죽 각반, 장교용 혁대, 종군휘장을 가슴에 달은 정장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코 위쪽이 남아있지 않았다-부서진 두개골, 뇌, 걸쭉한 핏덩이만 형체없이 남아있었다. 멍한 표정의 지저분한 해병이 일본군 위에 서 있었다. 두 다리를 적군 장교의 시신 양 옆에 꼿꼿이 세운 채, 그 해병은 소총의 총열덮개를 두 손으로 잡고 플런저처럼 천천히, 그리고 기계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려올 때마다 피범벅의 형체없는 덩어리에서 나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뇌와 피가 해병의 소총, 군화, 캔버스지로 만든 각반 뿐만 아니라 37mm 포의 바퀴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 해병은 확실히 완전히 충격받은 상태였다. 우리는 그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끌었다. 부상당하지 않은 그의 동료가 피로 얼룩진 소총을 한 쪽으로 치웠다. "여길 벗어나자고 친구."
그 불쌍한 녀석은 몽유병자처럼 대답하며 들것에 실린 부상병과 함께 끌려갔다. 손가락이 잘린 병사는 다른 손으로 일본도를 움켜쥐었다. "이 씨발것을 기념품으로 간직할테다"
우리는 얻어맞은 적군 장교를 포의 가장자리로 끌어다가 언덕 아래로 굴려보냈다. 폭력, 충격, 피, 살인, 고통으로 가득찬 이 사건은 누구든 전쟁의 영광에 대해 망상을 가진 사람이 봐야 하는 유형의 사건이었다. 적과 우리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시적 야만인인 것처럼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p.336~337)

전쟁은 야수같으며, 수치스럽고, 끔찍한 폐허이다. 전투는 이를 견디도록 강요받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를 보충하는 요소는 내 전우들의 믿을 수 없는 용기와 서로에 대한 헌신이었다. 해병대 훈련은 우리에게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서로에 대한 의리-그리고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단결감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새 천년이 오고 여러 나라들이 다른 나라를 노예로 만들려는 것을 중단할 때까지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나의 동료들이 그러했다-이 필수적이다. 부대원들이 말하곤 했던 것과 같이 "만약 조국이 살아가기에 만족스럽다면, 조국을 위해 충분히 싸울 수 있다"(If the country is good enough to live in, it's good enough to fight for) 특권에는 책임이 함께한다.
(p.344)

개인적으로 이 책이 인상깊었던 것은 저자 자신이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끔찍한지를 알고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무감을 버리지 않았으며, 동료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파멸과 살육의 신이 지배하는,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장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무감과 인간애를 간직하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한다. 설령 그가 보잘 것 없는 사병이었다고 해도.

막짤은 기분전환을 위한 지연이 케이의 짤로 마무리 ㄳ

덧글

  • 2017/09/25 19:4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9/26 00:5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Gull_river 2017/09/25 22:15 #

    그 드라마에선 슬렛지해머보다는 그 맞고참?의 미친 존재감이...
  • 연성재거사 2017/09/26 00:52 #

    개인적으로는 슬레지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아무래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져서 더 기억에 남더군요.
  • Gull_river 2017/09/26 00:55 #

    저는 그 부분은 드라마 다 보고 이자쳐서 확 와닿았고(...)
    보는 도중에는 금니뽑던 모습이나, 특히 피와 뇌수가 고인 해골에 돌던지던 모습에서 말이죠.
  • Gull_river 2017/09/26 00:55 #

    아 이름이 스내푸군요
  • 대한제국 시위대 2017/09/26 09:54 #

    더 퍼시픽은 존 바실론의 활약도 인상적이지만 유진하고 스내푸가....ㄷㄷㄷ
  • 연성재거사 2017/09/26 11:48 #

    버긴을 잊어먹으면 안됩니다. (찾아보니 <퍼시픽> 마지막에 살아계시다고 나온 3분 중 2분은 돌아가시고 로무스 버긴은 아직 살아계시다고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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