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에 관해 새로 나온 논문 by 연성재거사

요즘은 전공을 사법제도사로 갈아타면서 거의 손을 뗐습니다만, 제가 이전에 『징비록』에 관해 매우 부실한 체계로 연재를 올렸었습니다. 『난후잡록亂後雜錄』→초본 『징비록』→간행본 『징비록』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록이 변형되었는지에 관해 짤막짤막하게 다루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올해 서강대학교 사학과의 장준호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 「柳成龍의『懲毖錄』硏究」가 새로 나왔습니다. (링크: http://www.riss.kr/link?id=T14372891) 『징비록』의 저술 배경 및 체제, 성립 과정, 사학사적 의미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조선의 기록은 성립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변동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고→간행본의 과정을 거쳐 기록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 초고만 남아있거나, 초고는 사라지고 후에 간행된 간행본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초고부터 간행본까지 모두 남아있는 『징비록』의 경우는 흔치 않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와 관련된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요 사건들을 포괄하면서도, 간결하고 생동감있는 서술로 『징비록』은 7년전쟁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1차 사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록을 썼는지를 고려해야 사료가치가 명확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동안 이런 작업에 너무 소홀했다는 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준호 선생님의 학위논문은 기록의 정본화와 사료가치 문제 및 기록의 활용 측면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생각됩니다.

덧: 제가 이전에 다루었던 기록의 변동은 적지 않은 측면에서 유성룡이 선조를 의식해서 기록을 다듬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공개되는 기록의 특성상 기휘忌諱를 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유성룡 개인의 측면에서는 기축옥사의 악몽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축옥사에 관해 많은 부분이 명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가지 가닥은 잡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여립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들(적가문서)로 인해 규모가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적가문서들에는 관료 및 사대부들이 선조에 관해 주고받았던 뒷담화가 그대로 실려있었는데, 앞에서는 충성을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뒷얘기를 했던 정황에 선조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고, 이것이 분노로 돌변해서 옥사의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기휘도 기휘지만, 이 옥사를 봤던 유성룡으로서는 아무래도 선조 관련 기록들을 신경써서 다듬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인과관계를(기휘 차원인지,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 신경을 썼던 것인지) 명백하기 밝히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뱀발: 기축옥사에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고문끝에 죽은 것이 문제가 되어 책임위관이 정철이었는지, 유성룡이었는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선조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국의 국왕이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 측면도 있고 조선시대에는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었겠지만, 충격과 배신감에 격분한 사람이 비정상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시 선조의 분노는 엄청나서 위관이 누구이건 이걸 통제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막짤은 막둥이로 마무리 ㄳ



유사역사학 엄금

mouseblock

<META http-equiv="imagetoolbar" content="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