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에 대한 최근 논의 한국사韓國史

우리는 흔히 군주(왕이나 황제)들을 볼 때 명군-암군 구도로 보기 마련이다. 한국사-특히 조선사를 볼 때도 이런 논의를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임금을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명군을 꼽으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2명으로 모아진다. 세종世宗(1397~1450. 재위 1418~1450) 아니면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이다. 특히 정조는 개인적인 스토리와 더불어 그의 치세가 가지는 역사의 대비성 때문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왔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 연장선에서 계속되는 위협을 이겨내고 왕이 된 인물. 풍부한 학식을 가진 군사君師이자 철인군주. 실학과 개혁의 시대. 그리고 그의 사후 벌어진 세도정치와 반동, 민중의 저항과 조선의 몰락 등.

『선원보감』에 수록된 정조의 초상. 현재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어진은 실제 그의 모습이 아닌 상상도이다. 사실 『선원보감』 화가의 영 아닌 솜씨(...)를 감안하면 이 그림도 그의 실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_-;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한 개인의 존재 여부만으로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설령 그 개인이 국왕이라는, 국가원수이자 절대권력자라고 해도 말이다. 현재 학계에서 나오고 있는 정조에 관한 논의들은 정조에 대해 단순히 개혁의 명군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철두철미하고, 국왕으로써 의무감을 가지고 성실히 국정을 수행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성실도와 그가 국가조직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치를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군사君師론과 왕권강화책의 문제점

Jahyun Kim Haboush 선생이 지적하셨듯이, 정조의 군주상은 영조가 생각했던 군주상을 이어받은 것이었고, 그것은 유교적 군주상의 현실화였다. 유교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하는 도통道通은 "요-순-탕-무-주공-공자......."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공자 이후 분리된 군君(임금)과 사師(유교적 도덕성의 스승)를 하나로 구현하겠다는 것이 영조와 정조의 군주상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 파붕당破朋黨의 기조 위에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군사君師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정조가 보여준 능력은 가히 초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문과를 비롯해 관인과 유생들의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하곤 했는데, 출제 횟수가 재위 기간동안 1,347편, 연평균 58.6편에 달한다. 특히 1789년 이후에는 매년 80~90편 이상의 어제를 출제했으며, 후반으로 갈수록 어제御製를 통한 교육이 내용이나 대상 면에서 확대되었다.
한국사 교육에서는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 추구를 좋은 것처럼 인식되도록 가르치지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데, 정조가 해 놓은 것은 중앙관료 시스템의 두 축 중 하나를 무력화시켜놓은 것이었다.
조선의 정상적인 정치운영 구조는 대신과 언관을 양대 축으로 한다. 이는 언관의 사표로 인식되는 조광조도 인지했던 것이었다.

정치와 교화는 마땅히 의정부에서 나와야 합니다. 근래 대간이 정령政令을 건의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이 그들의 임무는 아닙니다. 의정부와 육조가 국사를 논의하여 큰 일은 임금께 아뢰고 작은 일은 스스로 처리함이 옳습니다. 대간은 잘못된 것만 규찰하면 됩니다.
(『정암집靜菴集』 《경연진계經筵陳啓》 「다시 대사헌에 재직할 때 올린 8번째 계[復拜大司憲時啓八]」)

의정부와 육조로 대표되는 대신이 가지는 권한과 위엄은 그들의 국정운영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이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감찰역할을 하는 것이 삼사로 대표되는 대간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산림세력의 정치간여를 막고 공론을 반영하던 당하관 청요직의 통청권을 금지했다. 이조낭관의 통청권과 한림의 자대제를 막은 것 또한 같은 방향에 있었는데, 특히 정조 대 중반 이후에는 당하관의 공론을 대표하던 전랑과 한림의 후임자 선발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정조가 설계하고 만들어놓은 체제는 삼사·전랑·문임직을 중심으로 한 청직(언관직) 중심 체제를 해체하고 대신권-왕권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구조를 수립한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 삼사의 언론 활동이 매우 침체되는 폐단이 일어났다. 즉, 균형과 견제 시스템의 중요한 축이 무기력해진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론君師論의 일환으로 정조가 직접 신하들을 가르치는 초계문신제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정약용은 초계문신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생각건대, 호당湖堂에 사가賜暇하는 것과 내각에서 초계하는 것은 태평한 세대의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과거 보이는 법을 마련한 까닭은 어진이를 택해서 뽑고 그 능함을 알아서 등용하려 함이다. 이미 과거로 뽑아서 벌써 벼슬을 제수했고 이미 청화의 지위에 좌정했는데, 이 사람을 다시 시험하고 이 사람을 다시 고과考課하니, 이것이 어찌 어질고 유능한 자를 대우하는 도리인가! 후세의 실상 없는 글은 곧 광대들의 잡스러운 희롱이며 조충雕蟲의 작은 재주이다. 이것으로 놀이하고 잔치하거나, 혹 군신간에 서로 농지거리하는 데에 가까우면 호당의 제술製述하는 것도 진실로 좋은 일이 아니다. 하물며 초계하는 법은 새로 진출한 선비까지 널리 뽑으니, 총명함과 우둔함이 서로 섞이고, 공교로움과 졸렬함이 서로 나타나게 되어서, 덕 있는 사람을 대우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또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어전 지척御前咫尺에 돌아앉아서 여러 가지 경서를 강하도록 하니, 잘못 실패하는 때도 있어 황구惶懼한 땀이 등을 적시기도 한다. 혹 가벼운 벌이라도 받게 되면 졸렬함이 다 드러나는데, 동몽童蒙같이 때리며 생도生徒같이 단속한다.
한번이라도 이 선발을 거친 자는 의기가 움츠러들어서 감히 낯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하며, 문득 임금의 사인私人이 되어버리니, 이것은 좋은 법제가 아니다. 신하로서 사적仕籍을 금규金閨 (조정)에 통한 자가, 무릇 포부가 있으면 혹 소장疏章을 올려서 일을 논하고, 혹 언의言議를 드려서 정사를 돕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는데, 어찌 반드시 거자擧子로 굴복시켜서 그 포부를 시험하는 것인가? 초계해서 과시課試하는 법은 지금부터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경세유표』 《춘관예조春官禮曹》 「예관지속禮官之屬」)

정약용은 소위 군사론으로 대표되는 정조의 통치 방식의 문제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조 대 초계문신들이 삼사의 간관직을 맡게 되면서 국왕에 대한 간언이 실종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초계문신들이 정조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정조의 근신으로 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뒤에 이어지는 다른 문제점들을 더욱 악화시킨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현인을 높이고 외척을 낮추었다[右賢左戚]-그런데 세도정치는?

흔히 세도정치에 대해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의 반동으로 나타난 정치권력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도정치를 주도한 핵심 세력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필두로 정조의 후광을 받고 출세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세도정치는, 탕평정치를 움직였던 경화거족京華巨族들의 수평적 연대와, 그들 문벌 내부의 주공主公-겸인傔人(양반이나 부호의 집에서 잡무를 맡아 보던 사람) 간 수직적 관계가 고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유봉학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19세기 세도정치기의 역사는 정조 시대와의 단절이라기 보다는 대체로 그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정조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조는 우현좌척[右賢左戚]-"현인을 높이고 외척을 낮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였고, 척신의 정치개입에 대해 비판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 사후 정국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애당초 정조가 구축해 놓은 체제는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치밀하게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는 정조와 같은 역량의 군주에 의해서만-사회가 변할 경우 정조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이 나온 군주가 나올 때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역량의 군주가 항상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국정을 운용하면서도 그 와중에 매년 80~90회 이상 관원과 유생들 시험문제를 출제할 역량의 국왕이 몇 세대에, 몇 명이나 나오겠는가?
정조가 구상한 체제의 한계는 정조의 사망과 함께 그가 구축한 정치질서가 일거에 무너진 것에서 드러난다. 어린 국왕의 존재는 탕평군주가 행사하던 권력을 공백으로 만들어버렸고, 정조 말년간에 규장각으로 성장했던 외척이 그 권력 공백을 잠식했기에 세도정치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현좌척"의 원칙은 권력독식의 논리로 악용된다.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아! 선정신 이황李滉의 말에, ‘외척이 어진 것은 나라의 복이 되지만 만약 어질지 못하면 나라의 화가 되는 것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속이 그릇되고 각박해서 어진 자는 항상 적게 되니, 지금의 외척 역시 어찌 낱낱이 다 어질기를 보장하겠습니까? 비록 어질기가 두광국竇廣國·음식陰識(모두 외척이면서 벼슬을 거절한 인물)과 같다 하더라도 조정 일에 간여하여 군덕君德에 흠을 입히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현자를 어찌 쉽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현인을 높이고 외척을 낮추는 것[右賢左戚]이 바로 우리 선조先朝[여기서는 정조]의 성덕과 지선至善 가운데 하나의 큰 규범이었으니, 더욱이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중략)......삼가 원하건대, 척신戚臣 박종경朴宗慶에게 엄중히 물리치는 법을 쾌히 시행하여 영원히 보전하는 은혜를 내리소서."
(『순조실록』 순조 12년(1812) 11월 7일)

이 상소에서 탄핵 대상이 된 박종경은 순조의 외삼촌이다. 이 상소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우현좌척의 논리가 되려 안동 김씨의 경쟁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_-;되었다. 안동 김씨의 영향력이 확고해지고 이서구나 김재찬 등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했던 인물들이 정계에서 배제되는 상황에서, 정조의 우현좌척론은 내로남불식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정조가 그리던 정치구도는 이런 것이 절대 아니었지만, 정조 자신이 규장각 각신으로 키운 김조순과의 국혼을 정했을 때 이미 세도정치의 단서는 얼마든지 열려있었다.

장용영과 규장각-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는가?

정조의 개혁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기관이 바로 규장각과 장용영이다. 전근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계에서 국왕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상비군과 국왕의 직속 관료집단이다. 이를 간파한 정조는 자신만의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이 개혁정책으로 인식되면서 이 두 기구에 대해서 단순히 좋게 받아들이기 쉬운데, 현실은 단순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넘겨버릴 만큼 단순하지 않다.
애당초, 장용영의 설치는 정상적인 조치로 보기 어려웠다. 장용영은 공식적인 부대이기 보다는 정조의 사적 기구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적 기구의 운용에 국가 재정이 전용되었다. 처음 50여명의 소규모로 시작할 때는 이 문제가 크지 않았지만, 10,000명 단위를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운용비 마련을 위해 막대한 환곡이 운영되면서 민폐를 만들고 있었다. 정조조차 장용영의 문제점을 시인했을 정도였다. 정조의 인정을 받았던 이서구가 정조 사후 장용영 혁파를 주도했던 것도 문제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규장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장용영과는 달리 규장각은 정조 사후에도 계속 살아남았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정조가 설계한 규장각의 기능이 경화거족들의 필요와 부합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지적을 읽어보자.

예문관과 규장각에는 화직華職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직제학·응교·직각直閣·대교待敎라는 빛난 관명[華名]이 많이 설치되었고, 호당독서湖堂讀書ㆍ내각응제內閣應製ㆍ월과月科ㆍ순시旬視 따위 문사의 화려함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편안하게 노닥거리기만 하여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한다. 빈궁한 집에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변경지대에 어떤 걱정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중략)......
규장각은 어제문자(御製文字)를 소장하는 곳이니, 그 직이 어찌 중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로 인해서 별도 아문을 세우는 것은 옛 사람의 뜻이 아닌 듯하다......(중략)......우리 세조世祖 때에도 규장각을 설치하기를 의논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는데, 우리 선대왕이 효성이 깊어서 조상의 공덕을 빛내기 위해 드디어 각을 세웠으니, 이것은 매우 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직이 너무 조촐하고 그 명망이 너무 빛나니, 이로부터 옥당이 드디어 낮아져서 선임選任하기에 남잡濫雜함이 많은데,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다.
(『경세유표』 《춘관예조春官禮曹》 「예관지속禮官之屬」)

정조가 규장각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규장각을 거쳐가는 것이 홍문관을 거치는 것 보다도 영예로운 관직 코스가 되어 버렸다. 정치판이 세도가문에 의해 독식되는 상황에서, 규장각은 국왕의 친위세력을 양성한다는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세도가문 관료들의 문벌기구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이를 견제해야 할 3사의 언관은 이미 앞서 말한 조치들로 인해 무기력해진지 오래였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정조의 정책에 관해 근래에 학계에서 제기된 다른 관점을 간단히 정리했다. 너무 부정적인 견해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사실 정조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해도 좋은 임금은 아니다. 정조의 정책에 문제점을 제기한 학자들도 시인하듯이, 정조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으며, 군주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정치 시스템을 군주 개인의 역량에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도록 설계한 점이라는 것이 가장 큰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정조가 구축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조와 같거나 그 이상의 역량을 갖춘 임금이 필요하고, 정조의 승하와 더불어 어린 국왕이 즉위해 퍼즐이 빠지자 정조가 구축한 체제는 바로 붕괴해버렸다.
그럼 정조는 명군인가, 암군인가? 나는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국왕의 치세에 공과를 따지고 거기에 평가를 매겨서 명군/암군 딱지를 붙이는 것은 중세 사학이 하던 일이다. 역사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훨씬 복잡하고, 현재 학계에서도 정조와 그의 치세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참고자료
Jahyun Kim Haboush.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Yongjo and the Politic of Sagacity. Columbia Univ. Press. Paperback Edition in 2001
역사학회 『정조와 18세기-역사로서 18세기, 서구와 동아시아의 비교사적 성찰』 2013
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너머북스. 2016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정조와 정조 이후-정조 시대와 19세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사. 2017

마지막은 러블리즈의 지여니 케이짤로 마무리 ㄳ

덧글

  • 위장효과 2017/08/12 07:01 #

    스노우 님의 포스팅하고도 연관이 있는 주제-최근 영국내전사 포스팅의 프롤로그격이었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경향, 그리고 스튜어트 왕조 초기 국왕들에 대한 포스팅도 보면 단순한 암군/현군 가르는 시각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지적하셨죠. 게다가 휘그사관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사실 영국 내전의 중요한 단초들은 제임스 1세도, 찰스 1세도 아닌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미 다 숨어 있었고 어떻게 보면 엘리자베스야말로 폭탄돌리기 시전한 격이었다고나 할까 뭐 그렇습니다.(그렇다고 이제와서 버진 베스 여왕이 암군이었다!!! 라고 밝혀진 건 더더욱 아니고) 일반인들을 위한 책에도 "순조대의 세도정치는 실제 영,정조 시기, 특히 아버지인 정조 시기에 이미 그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서술이 이어지고 있는지라 이런 논의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저나...막짤은 이 무슨 난신적자같은 짓이란 말이요! 이것은 이단이다!!!!!!
  • 연성재거사 2017/08/13 23:08 #

    사실 이거 아니더라도 세조도 조선의 체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하긴 합니다만, 그 방향이 영 아니었다는 문제도 쓸까 생각중입니다.

    덧: 덕질에 난신적자이니, 이단이니 하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고갱님 ㄳ
  • 까마귀옹 2017/08/12 20:45 #

    정조는 '공과가 지나칠 정도로 뚜렷한 군주'라고 표현하는게 그나마 정답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면, '당시 정조로서 정말 그 방법 밖에 없었나?'란 겁니다. 정조가 구축해버린 그 체제가, 정조로선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나마 부작용이 덜한 방법이야'라고 생각해서 고의로 구축한 것인지, 아니면 사도세자 추숭과 같은 다른 부분에 매달리느라 어어어 하다가 자신조차 미처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그걸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방치해버린 것인지 이 부분이 좀 헷갈리는군요.

    그리고 타브가치 님은 정조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는 오히려 '근대 중심주의에 매몰된 것'이라고 주장하더군요.(http://blog.naver.com/lord2345/221063995130)
  • 연성재거사 2017/08/13 23:07 #

    계속해서 참여계층이 좁아지던 조선의 정치판이 결국 궁극적으로 치달은 것이 세도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사실 같은 안동 김씨여도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정조의 성격상 이걸 대대적으로 뜯어고칠만큼 개혁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고 판단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천재들이 그렇듯이) 본인의 능력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다른 사람도 그런 능력이 있냐는 별개의 문제겠지요-_-;
  • 홍차도둑 2017/08/12 14:48 #

    이런 부분이 있어 고전이 참 어렵습니다.
    이글루의 한 분이 고전 격언 이야기 할 때 진짜 쇠직구 한번 날릴까 말까 하다...고전의 뜻을 아주 그냥 잘못 이해하고 있더라구요.

    역사란 일종의 흐름이고 그 흐름에 있어 특이점이 있기 마련인데 기록을 더 뒤지고 그에 대한 여러 해석을 하다보면...아이고 머리야...

    정조의 그 신하들을 가르키는 그것과 정약용의 비판을 보면 하드리아누스가 무세이온 학자들하고 토론한 뒤 무세이온의 한 학자가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뒤에 30만 대군을 거느리는 사람하고 토론이 됩니까?"

    PS:요즘 여신님께서 겜 잘하시는데 말입니다...
  • Troy_PerCiVal 2017/08/13 07:01 #

    근데 사실 그양반은 그때 무세이온에 잘난척 하러간게 진짜로 맞. . . 그리고 그거 한번으로 끝이었죠.
  • 연성재거사 2017/08/13 23:05 #

    사실 그거 아니더라도 정조는 진짜 잘난 척 해도 할말 없는 수준이긴 합니다.(.........................)
  • Gull_river 2017/08/12 23:13 #

    그러니까 정조랑 지연이가 이미지와 민낯이 다르다는 말씀이시죠? (도망)
  • 연성재거사 2017/08/13 23:03 #

    너님 숙청!!!!!!
  • Troy_PerCiVal 2017/08/13 00:52 #

    정약용 선생이 정조의 치적 대부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저거였군요.
  • 연성재거사 2017/08/13 23:04 #

    사실 정약용 아니어도 이서구처럼 정조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꽤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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