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 Historiography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흔하게 상대하는 시비-솔직히 역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학이 상대해야 하는 시비거리다-가 "그걸 도대체 어디에 써먹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시비에는 "유용"의 기준이 대체 무엇이냐는 허점부터 있다. 태양으로 간식용 컵라면을 익힐 수 없다던가, 담뱃불을 붙일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이 무용하다고 하지 않으니까.
나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그 중에서도 역사는 인간이라는 소재에 시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하기 때문에 더욱 특수한 용도로 도움을 줄 수 있다. 크게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작게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학문이다"라고 답을 했다. (솔직히 말해, 개인적으로 "역사를 소재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준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마키아벨리를 든다) 하지만 전공의 세계로 들어오면 역사철학의 논의는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쉬워진다. 과거의 사실을 밝혀내고, 재구성하는 "역사학"은 역사학도의 몫이라고 하자. 그럼 일반 대중들이 "역사"를 즐김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자신의 짧은 글 「How to Read and Understand History」(1957)에서 답을 준다. (국내에는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버트런드 러셀 지음. 박상익 옮김. 푸른역사. 2011)는 번역으로 단행본이 나와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쾌락으로서의 역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쾌락으로서의 역사다. 힘들고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여가 시간을 기분 좋고 유익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역사다. 나는 비록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아마추어로서 수많은 역사책을 읽어왔다. 이 책에서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내가 역사 읽기로부터 이끌어낸 것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굳이 역사학자가 되려하지 않고서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들려주는 데 있다.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p.17)

전공이 아닌 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역사는 러셀이 말한 대로 "지적쾌락의 소재로 여가시간에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가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러셀은 먼저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로 나누어 말한다.

역사에는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가 있다. 두 종류의 역사는 모두 가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가치는 각기 다르다. 거시적 역사는 어떻게 세계가 오늘의 세계로 발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시적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며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준다. 두 역사는 처음부터 나란히 가르쳐야 한다. 초기 단계에는 영화를 보면서 해설을 곁들이는 방법이 좋다.
(위 책. p.19)

영화와 같은 미디어 영상물은 대중에게 역사를 어필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수단 중 하나이다. 더욱이 러셀의 말대로 초기 단계에서 그 영향은 매우 크다. 때문에 나는 이쪽 분야의 제작자들이 단순히 흥미만 고려하지 말고 초기 단계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고려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시청률이 핵심이다. ㄳ
얘기가 잠깐 샜는데, 러셀은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를 나란히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거시적 역사는 역사의 흐름과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고, 미시적 역사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준다. 이는 결국 "역사 과학"(역사 철학이 아니다!)과 "인물 연구"의 문제로 이어진다.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들은 많다. 하지만 사실의 절반 이상을 생략하고 잘라냄으로써만 만들어지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공식을 배워서는 곤란하다.....(중략)......역사가 수행할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기능이 남아있다. 하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겸손한 일반화를 통해 (역사 철학과 반대되는) 역사 과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물 연구를 통해 "드라마나 서사시의 장점"을 "진실"이라는 장점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들 두 기능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우위에 놓고 싶은 생각이 없다. 둘은 매우 다르며, 다른 타입의 정신에 호소력을 갖는다. 그리고 둘은 각기 다른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위 책. p.31)

그러면 이런 일련의 방법론을 통해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역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증대시키는 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 책. p.44)

역사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인류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의 총체적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안에는 인간을 매개로 한 모든 것이 시간의 변화를 토대로 묶여 있다. 러셀은 계속 말한다.

......지금까지 역사를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역사에는 또 하나의 부가적인 기능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다른 모든 것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우리의 육체적 삶은 시간과 공간에서 작은 범위에 국한되어 있지만, 우리의 정신은 그런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 천문학이 정신의 공간적 영역을 확장시켜준다면, 역사학은 정신의 시간적 영역을 확대해준다.
(위 책. p.91)

신학자들은 신이 모든 시대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 또한 지극히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그 이상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와 통찰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현재에 살며, 현재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삶에는 행동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현재가 지닌 감정적 예리함이 무뎌지고 드넓은 전망을 확보하게 될 때 우리의 행동은 최선의 행동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지만, 다른 사람은 선이든 악이든 무언가를 후세에 남기고 간다. 역사에 의해 사상과 감성이 확장된 인간은 후세에 무언가를 남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후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하게 될 무언가를 남기게 될 것이다.
(위 책. p.93)

사실, 이 글은 러셀이 도입부에 밝혔듯이 "학문으로서의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영향력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 측면에 관심을 더욱 가지는 현대 역사가들은 "인물 연구를 통해 드라마나 서사시의 장점을 진실이라는 장점과 결합시키는" 생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대중이 역사의 소비하는 주체가 될 수는 있어도, 모두가 역사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러셀이 말한 것들은 바로 그런, 대중들에게 역사가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소재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긍정적 측면에서 주요한 것들을 얘기했다. 역사학의 입장에서도 이는 주의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맥밀런이 말했듯이 역사가가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을 소홀히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공백을 채우려 들고, 그렇게 역사를 -주로 국가주의와 한물 지난 민족주의의 소재로- 악용해 놓고 그들은 전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막짤은 종종 그랬듯이 케이로 마무리 ㄳ

덧글

  • 사회과학 2016/08/08 01:30 #

    잘 보았습니다. 사실 역사도 그렇고, 연구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이 학문을 접하는 이유는 결국 본인 만족 떄문이죠. 효용 자체가 그 이유가 되는데, 왜 실용 실용 따지는지;;


    그나저나 학문 연구로써의 역사는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을까요?
  • 액시움 2016/08/08 02:19 #

    실용을 따지는 이유는 돈 들여 대학 교육을 받았으면 그 이상의 돈을 뽑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쪽은 아무래도 소수의 천재가 아닌 이상 그런 확신을 얻기 어렵죠. 순전히 개인적인 만족만 얻을 수 있다면 사실상 돈 많은 귀족들이 즐기는 유흥거리나 다름없게 되니까요.
  • 트레버매덕스 2016/08/08 19:04 #

    근데 은근히 수학자들에게도 그런 면모가 있는거 같더라구요. 수학의 유용성을 따지고 드는거를 천박하게 여기는 태도말이죠. 뭐 러셀은 유용성을 천박하게 여기는 태도 덕분에 그리스에서 수학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요.
  • 사회과학 2016/08/08 19:48 #

    액시움//대학에서의 공부는 학문적 측면 아닐까요?? 제가 말하는 건 단순 여가 측면입니다
  • 연성재거사 2016/08/09 20:39 #

    학문 연구로써의 역사학은 역사철학과 학문론적 방법을 기반으로 놓고, 그 위에 쌓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걸 알려면 이런 곳에서 댓글로 물어볼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세요.
  • Masan_Gull 2016/08/08 02:49 #

    초기 단계에는 영화를 보면서 해설을 곁들이는 방법이 좋다.

    이렇게 기황후와 명성황후, 태왕사신기를 보고 김진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며 역사를 배웠습니...(읍읍)
  • 연성재거사 2016/08/09 20:38 #

    ㅡ_ㅡ;;;;
  • Masan_Gull 2016/08/09 22:44 #

    그나저나 최근에 빵떡이로 갈아타신것 같더라니 간만에 케이 짤이군요
  • 연성재거사 2016/08/09 22:47 #

    이 아저씨가..........ㅡㅡ+
  • Kael 2016/08/08 17:37 #

    역사에 대해 어쩌다가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는 기억 안나는데, 역사는 알면 알 수록 재미있는 게(아니 모든 공부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있지요. 그 '재미'의 장벽이 사람마다 다르다는게 문제지만요.
    (바둑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바둑은 재미를 알기까지 오래걸리는데 재미 알면 못나와요)
  • 연성재거사 2016/08/09 20:40 #

    일단 "학문"에서 요구하는 영역을 일반인에게까지 요구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 연구자들의 소통부재가 좀 아쉽습니다.
  • 위장효과 2016/08/16 19:52 #

    일단 님은 유일여신 오프로디테님을 배교하고 나간 것부터 해명해야...
  • 연성재거사 2016/08/17 20:26 #

    背敎라니. 倍敎라능.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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