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을 주고받으면 처벌한다-그런데 없으면 못살겠다! by 연성재거사

김영란법의 시행을 앞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뇌물이 오가고 이에 대한 법을 만들어서 금지하려고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명문名文을 만들어서 법이라고 못박아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적용 범위가 어디인지, 사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와 같은 고민들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뇌물도 예외는 아니다. 뇌물을 주는 수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도의 수법이 스폰형이다. 뇌물을 판별하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 대가성인데, 후원 형식인 스폰형 뇌물은 대가성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평소에는 소위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 선물을 주고받고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임용, 승진, 사업 수수 등-이 되어서야 이득을 얻어내는 것을 잡아내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런 식의 뇌물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서로 아는 사람끼리 도우며 사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인정"이 없이 사는 사람은 비난을 받았다. 하긴 김영란법에 대해서도 이런 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인정이고, 뇌물이란 말인가?

조선도 이런 고민을 당연히 했다. 건국 초에는 이런 고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건국 공신들이 청렴결백한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라, 다른 문제들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물론 혁명 동지적 유대관계 때문에 눈감아 준것도 없지는 않다)
여기에 칼을 빼든 사람은 세종이었다. 복잡하게 온갖 사안을 고민하면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이 임금은 조선의 통치구조를 건전한 공무원 집단이 운용하는 관료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관료제를 정비하고 조직은 확장되었고, 조세제도도 개편되어 국가 살림도 풍족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안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물질적 풍요만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해먹을" 여지는 많아진다는 것을 말이다. 세종도 이를 알고 있었다.
1424년 7월,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전교를 내리면서 폭탄선언을 했다.

前朝之季, 賄賂公行, 舊習猶存, 京外官吏以官物公然贈賄, 恬不爲怪. 其中有不肯受贈者, 則反遭譏誚.  由是, 贓吏相繼得罪, 予甚憫焉. 觀律文內, 但有以官物與人之罪, 無受人贈遺之律. 故今欲立法, 使受者與與者同罪. 特下敎旨乎? 令攸司啓聞立法乎?
전조前朝(고려) 말에 뇌물을 공공연하게 왕래하더니, 구습舊習이 아직도 남아서 경외京外의 관리들이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하게 뇌물로 주고도 태연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괴이쩍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에 주는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도리어 기롱과 조소를 받는다. 이로 인해 장죄贓罪를 범하는 관리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법조문[律文]을 보면, 다만 관가의 소유물을 남에게 준 죄만 있고 보내 준 것을 받은 죄에 대한 율이 없다. 그러니 이제 법을 세워, 준 자나 받은 자에게 다 같이 죄를 주고자 한다. (내가) 특별히 교지를 내려야 할 것인가, 유사攸司(사법기관)를 시켜 아뢰게 하여 법을 세울 것인가?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7월 14일)

세종으로써는 보기 드문 강경한 태도였다. 눈치빠른 사람은 이 때 "그렇게 강경하게 나가다간 억울한 사례가 나온다"는 식으로 구실을 대면 세종이 더 강하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영의정 유정현은 "이런 법을 만드는 것이 사법기관의 역할이다"라고 하면서 세종을 달래 양보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 바닥을 본 사람들은 안다. 대신들이 이런 스폰형 뇌물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세종이 나오자 유정현은 이렇게 말한다.

如我老僕, 於受膳餘香脯, 何害?
나같이 늙은 사람이 음식이나 향포를 받아서 무엇이 해롭단 말이오?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7월 14일)

여기에 대제학 변계량卞季良과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즉시 동의했다.

食物贈受, 似乎無妨, 何必幷禁?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하필 모두 금할 것이 있겠소?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7월 14일)

사헌부의 상소로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처벌한다"는 법 자체는 만들어졌지만, 이런 사안에는 대신들의 의견이 반영된다는 것을 함께 고려하면 결론이 나온다. 암묵적 예외조항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도 이 결과를 알았고, 그의 문제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종은 계속해서 이 문제를 제기한다.

前朝以此而衰亂, 卿等之所見也. 至於前代之事, 則能辨其是非, 獨於其身, 則不覺其是非可乎? 寵賂之行, 如此不已, 則國之衰亂, 可立待也.
전조前朝(고려)에서 이렇게 해서(뇌물이 횡행해서) 나라가 망하게 된 사실은 경 등도 본 바이다. 전대에 한 일에 대하여는 시비是非를 잘 판단하면서,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 잘잘못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정실과 뇌물[寵賂]이 이렇게 횡행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곧 나라의 쇠란衰亂이 멀지 않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3월 14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예외조항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실제로 이런저런 비리 사건이 터지고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스폰형 인간관계를 위한 주고받기 문화가 있었다. 세종은 이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이라는 관행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없어질 리가 있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문제는 흐지부지 되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 사단이 터졌다. 1447년 윤4월 14일, 세종은 신하들을 불러 제주목사 이흥문李興門을 국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有一宦寺娶濟州女, 居其州京邸傍近, 今言"牧使李興門以賄賂之物, 竝稱進上, 表以木栍, 其數甚多." 興門分憂海外, 不恤民隱, 專事賄賂, 欲令鞫之, 議諸本府以啓.
한 내시內侍가 제주濟州 고을의 경저京邸 근방에 살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지금 말하기를 "목사牧使 이흥문李興門이 뇌물로 보내는 물건을 모두 진상進上하는 것이라 일컫고 나무조각으로 표하였는데,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라고 한다. 이흥문이 바다 밖에서 지방 정치를 하면서 백성의 고통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로지 뇌물 쓰기를 일삼으므로 국문하게 하려 하니,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어라.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윤4월 14일)

지방에서 중앙으로 물건을 올려 보내면 그것이 조정의 왕에게 진상하는 세금인지, 높으신 분께 가는 뇌물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이흥문은 이를 이용해서 열심히 스폰형 선물을 올린 것인데,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내시 한 명이 제주도에 있는 경저京邸* 근처에 사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의 눈에 제주도에서 올리는 물품이 세금으로 올리는 진상이라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 보인 것이다. 여자는 이를 남편에게 말했고, 남편인 내시는 이를 다시 세종에게 고한 것이다.
* 서울에서 출장온 사람들이 드나드는 사택. 요즘으로 치면 출장사무실의 숙소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주목한 부분은 뇌물의 양이 아니라 뇌물이 나온 곳이었다. 제주도는 연안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다. 그만큼 운송할 때 부담과 위험이 몇 배는 크다. 그런 곳에서 백성을 동원해 상납을 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세종의 태도였다.
원래 중국과 달리 내시의 권력이 엄격히 제한된 조선에서 내시가 관원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세종이 법을 어기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의 분노가 심했다. 이건 세종의 평소 성품으로도 넘어갈 것이 못되는 것이, 대신쯤 되는 사람이라면 다른 곳은 몰라도 제주도의 상납은 자제시켰어야 했다.
사안이 사안이어서 세종의 성격을 아는 조정은 뒤집어졌다. 영의정 황희를 필두로 우의정 하연河演,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촤참찬 정분鄭苯과 정갑손鄭甲孫 등 대신과 신하들이 줄줄이 자수하고 사죄했다. 세종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予欲考諸律文與古制, 嚴立禁防, 卿等知之.
내 여러 법률 조문과 옛날 제도를 상고하여 엄중히 방지책을 세우고자 하니, 경들은 그리 알라.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윤4월 14일)

세종은 이렇게 만든 법안을 사헌부에 내려서 상소 형식으로 올리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안은 선물의 양에 상관없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다.

『六典』載"受賂者以不廉論", 律有枉法不枉法, 與夫非因公事受罪坐贓之文.  伏望主上殿下發揮剛斷, 自今以後, 凡犯此禁者, 悉從『六典』與律文, 與者受者, 皆計其贓, 依律科罪, 論以贓吏, 所犯雖小, 竝皆不赦, 以懲貪汚之徒, 以臻廉讓之風, 不勝幸甚.
『육전六典』에 "뇌물을 받는 자는 청렴하지 못한 죄목[不廉]으로 논한다"고 실려 있사옵고, 율律에는 법을 굽히는 것과 법을 굽히지 못하는 것이 있고, 또한 공사公事로 인하지 않아도 장물죄의 연좌로 죄를 받는 조문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 강단을 발휘하시어, 지금 이후로는 무릇 이 금법을 범한 자는 모두 『육전六典』과 형법[律文]에 따라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그 장물贓物을 계산하여 율대로 죄를 매기되, 장리贓吏로써 논죄하여 범한 바가 비록 작을지라도 모두 다 용서하지 말아서 탐관오리의 무리를 징계하여 청렴 겸양하는 풍습을 이루게 하시오면, 그 위에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22일)

세종은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동의를 구했다. 이때의 대신들은 하연, 김종서, 황보인으로 1424년의 대신들이 퇴장하고 난 다음 세대의 대신들이었다. 물이 바뀌어서인지, 사안이 사안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반응이 1424년과는 달라서 "신들이 혐의쩍고 부끄럽다"면서 말을 시작했다. 약점을 제대로 잡혔기 때문에 법안에 반대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정치인의 직업특기(?)인 "말꼬리 잡기"가 이어졌다.

今疏草有"肆行貪饕, 無所紀極, 與賂賄權門"之語. 今之士大夫, 雖未廉正, 然士風不至於此極也. 況所謂權臣者, 君失其道政權移下之謂也. 我朝安有所謂權臣者哉? 如此之辭, 書諸史冊, 以垂後世, 則千載之下, 孰謂我朝爲聖明乎? 臣等竊恐言過其實.
이제 상초문 초안에 "탐욕을 부리는데 끝이 없고, 권신權臣들에게 뇌물을 준다[肆行貪饕, 無所紀極, 與賂賄權門]"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사대부가 비록 청렴 정직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선비의 풍습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소위 권신權臣이라는 것은 임금이 도를 잃어 정권政權이 아랫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이르는 것인데, 우리 조정에 어찌 소위 권신이라는 자가 있사옵니까? 이같은 말을 사서[史冊]에 써서 후세에 전하오면 천 년의 뒤에 누구라 우리 조정을 성명聖明하였다고 이르오리까. 신들은 그윽이 두렵건대 말이 그 실상보다 지나친가 하옵니다.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22일)

표현이 현실보다 지나치고, 과장된 문구를 따라 그대로 법을 세우면 세종도 후대의 각박한 평가를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 충고내지는 협박(?)였다. 하지만 세종은 작정을 한 상태. 문구만 지우고 법안은 그대로 가결했다.


그럼 이 법안에 대해 사관史官은 뭐라고 했을까? 사관은 이렇게 썼다.

因李興門立是法, 然至於食物, 皆以贓論, 未免有苛察之弊.
이흥문李興門으로 인하여 이 법을 세웠는데, 그러나 음식물에까지 모두 뇌물로 논할 것은 가혹하게 따지는 폐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22일)

공정함을 지켜야 하는 사관이 왜 김영란법에 투덜거리는 언론인들이 생각나게 하는 이런 논평을 썼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424년 유정현과 대신들의 발언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그냥 늙은이[老僕]가 아니라 대신이다. 대신 쯤 되는 사람들이면 녹봉도 많이 받고, 또 이런 관료들은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나는 수익이 따로 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자신들이 사 먹으면 그만이지, "먹을 것 좀 상납 받기로서니 뭐가 문제야?"라고 말하는 게 정상인가?
하지만 여기는 자타공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조선. 상업의 발달은 고려 때 보다도 오히려 더 후퇴했다. 돈이나 쌀은 많아도 원하는 물건을 매입할 만한 가게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세계에서 스폰형 선물(상납)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었다. 유정현과 변계량, 허조의 말은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대신이고 최고 지도층인데, 최소한 식욕과 미각은 만족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하소연이었다. 사관도 이에 동의하는 취지로 논한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에서 온갖 법안에도 불구하고 인정人情으로 대표되는, 스폰형 선물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였다. 더욱이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관료가 되면 본인의 출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녹봉과 보유하는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이 있지만 이 수입은 대개 쌀에서 끝난다. 관료로써 체면치례 하고, 일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물품이 필요하고, 시장이 없는 동네에서 이런 것을 구할 수 있는 제일 빠른 길이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흥문 사건도 이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흥문이 맡았던 지역이 제주도였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던 것이지, 아마 다른 지역이었으면 세종도 이렇게 기회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방의 수령은 공/사적으로 이런저런 물품을 구하기 상대적으로 쉬운 위치에 있었고, 서울에 사는 관료들이나 일족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보내주는 물품 하나하나가 요긴하게 쓰였다. 언젠가 대학원 선배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조선시대 서간문들이 초서체로 쓰여져서 읽기 힘든데, 애써 읽으면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지난번에 인사를 드리고자 했지만 몸이 안 좋아서......지난번에 보내주신 ~는 잘 받았습니다.......편지를 보내는 편에 ~를 보내겠습니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였는데, 조선이 이런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현실 사회가 이 모양이니 법이 철두철미하게 지켜질 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세종 이후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간행되고,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분경금지법을 포함한 수많은 부패방지법이 있었지만, 정적政敵을 공격할때 사용하거나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준수하거나 단속하는 수준이었다. 인정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것을 단속받는 사람도, 단속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아무리 이상적인 법이라 해도 사회의 현실에 맞추어야 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사회 현실을 바꾸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 현실에 문제가 있는데 법을 흐지부지로 만들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서 맞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답이다.

참고: 해당 포스팅은 『뇌물의 역사-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공저. 이야기가 있는 집. 2015)의 내용을 참고하고, 여기에 기록을 찾아 첨부해서 작성했습니다.

뱀발: 김영란법 때문에 말이 많은데, 일단 법 규정 자체는 예외조항을 너무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연료 같은 부분) 하지만 소리를 내는 쪽을 보면 오히려 문제가 많았던 조직으로 보인다. (기자라든가, 이상하게 고급화 된 농수산 식품이라든가.......)
판사님 마지막 뱀발은 위에서 생선 먹은 고양이들이 썼습니........(야!!!!)


덧글

  • asianote 2016/08/04 22:02 #

    청소를 해봤자 어차피 집이 더러워진다고 해서 청소를 안할 수는 없으니까요.
  • 연성재거사 2016/08/08 00:19 #

    그래도 이런 식으로 법과 사회의 괴리가 심각하면.......-_-;;;;
  • 홍차도둑 2016/08/04 22:22 #

    세종때의 본격 비리공무원으로 황희정승을 꼽지만 ...
    또다른 거대 비리공무원이 한명 더 있더군요. 박연이라고...
    분경은 물론이오 심지어 왕실악단을 데리고 정승들 잔치에 가서 연주시키는 밴드 운영에...
  • 누군가의친구 2016/08/05 01:49 #

    황희의 해당기록에 대해선 연재성거사님이 지난달에 기록의 문제점을 지적하신바 있습니다.
    http://xuecheng.egloos.com/4301670
  • 홍차도둑 2016/08/05 10:02 #

    누군가의 친구 님/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 답글도 달았지요.
  • 연성재거사 2016/08/08 00:21 #

    그런데 "인정"넘치는 조선에서 그건 정말 별 거 아니어서........
  • 네리아리 2016/08/04 22:31 #

    할말 못할말 다 하셨단 기자님들이 갑자기 자기검열운운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엣헴
  • 연성재거사 2016/08/08 00:19 #

    그동안 잘 먹던게 찔렸나보죠 크크크
  • 포스21 2016/08/04 22:44 #

    저게 유교의 태생적 모순이 가진 문제점이 아닌가 싶네요. 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어떻게라도 일정수준의 부를 끌어 모아야 하고 , 관직에 오르면 일족을 책임져야 하기 에 "청렴" 이란 걸 할 수가 없죠. 진짜 혈혈 단신이면 모르겠는데 , 가문의 뒷배경이 없다면 중국이든 우리나라 (고려, 조선) 모두 제대로 과거에 급제하기 힘들겁니다. 거기에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니 더욱 문제가 꼬여 버리죠. 차라리 어떤식으로든 양성화를 시켜야 하는데(중상주의 정책?) , 그건 또 유교적 이념에 반하는 문제가 있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이나 , 유교 도입후의 일본 - 에도시대 모두 비슷한 문제가 있었던거 같습니다.
  • 골든 리트리버 2016/08/04 22:58 #

    세종도 직접 화폐를 유통시키고 상거래를 활성화시키도록 노력하기는 했지만, 왕조의 근본적인 이념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 왕들은 세종과 달리 변명도 힘들어지게 되니 말이죠.
  • 연성재거사 2016/08/08 00:23 #

    애당초 시장에 나올만한 물건을 공납으로 거둬가는 나라에서 상업이 발달하기가........-_-;;;;
  • 2016/08/04 22:5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04 22: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홍차도둑 2016/08/04 23:03 #

    근데...하나 더 말하자면...이게 참 그렇기도 한게...한국언론의 영세함으로 본다면(여기서 뭔소리냐고 하실 분들 계시겠지만. 조선일보도 서구 언론과 비교한다면 영세합니다. 물론 취재관련쪽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게 참 그런 부분이 있어요...
  • 누군가의친구 2016/08/05 01:50 #

    그나마 세종이니까 저리 나올수 있는거겠지만 말입니다.
  • 연성재거사 2016/08/08 00:20 #

    영조도 강하게 나오긴 했습니다. 문제는 효과가.....ㅡㅡ;;;
  • Fedaykin 2016/08/05 10:57 #

    어쩌면 경제와 거기에 맞물리는 사회 구조 자체가 일정정도의 부패 하한선을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6/08/08 00:20 #

    네. 그리고 조선이 그걸 제대로 보여주었죠.
  • 위장효과 2016/08/05 11:33 #

    세종: "그러니까 뇌물수수라든가 촌지-와이로(!!!)-주고받는 것좀 없애자니까!"
    대신들: "그게 다 인정이고 사람 사는데 필요한 기름칠이라니까요? 그리고 해먹어도 그리 많지 않고 별로 해롭지도 않아요. 적당히 봐주자고요."
    세종: "그럼 대신 고용보장에 평생직장은 약속하리다."(속으로)'그래, 어디 이것들 두고보자.'
    .....시간은 지나고.....
    대신1: "신도 이제는 나이를 먹고 힘이 부치니 그만 자리를 내려놓고 낙향을..."
    세종: "하지만 불허한다."
    대신2: "어머님 돌아가셨는지라..."
    세종: "고기드릴테니 드시고 힘내서 업무에 매진하세요."
    대신3: "정말 여기저기 아프고 그러니 이제는 관두겠습니다."
    세종: "어의 뭐하냐? 가서 좀 진맥좀 해 드려라."
    아까 그 대신2: "진짜 힘들어서 그러니 이제는 관두겠습니다!!!!"
    세종: "재택근무 오케? 관용차도 한 대 드릴테니..."
    악덕상사의 진면목을 과시했던 것도 저 때 중신들이 반발한 거에 꽁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 연성재거사 2016/08/08 00:20 #

    사실 웬만한 벼슬 했다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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