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도 『주역』은 별 도리가 없더라 한국사韓國史

엊그제 올린 개드립에서 늘어놓았던 읽는 사람 고생하게 만드는 텍스트 중, 동양권의 지존은 아무래도 『주역』일 것이다. 원래 한자의 숫자가 지금에 비해 훨씬 적던 시절에 쓰여진 고문의 해석이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중의적으로 쓰인 한자의 뜻을 풀이하고, 어디서 끊어읽어야 하는 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해석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 문헌들이 후대에 출판되는 과정에서 주석가들의 해석이 함께 붙어 출판되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것을 다 떠나서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 불가의 영역에 있는 텍스트는 아무래도 『주역』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약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나중에는 자신이 나름대로 연구해서 『주역사전』이라는 연구서도 썼지만, 젊은 시절 정약용도 『주역』의 난해성 때문에 고생했다. 그래서 그는 이가환李家煥(1742~1801)을 찾아가서 질문을 해 보았다. 「자찬묘지명」에서 "어릴 때부터 영리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자찬한 정약용이지만 하긴 사람은 대개 자신의 어린시절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얌마) 그런 정약용 조차도 놀라게 하는 천재가 이가환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천재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한번 입을 열면 줄줄 내리 외는 것이 마치 호리병에서 물이 쏟아지고 비탈길에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으며, 9경·4서에서부터 제자 백가와 시·부賦·잡문雜文·총서叢書·패관稗官·상역象譯·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옹루癰漏의 처방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여유당전서』「정현묘지명貞軒墓誌銘」)

오늘날로 치면 사진급 기억력을 갖추고 철학, 문학은 물론 수학과 의학까지 그의 지식범위가 미치지 않는 범위가 없었다는 소리이다. 정약용은 이가환의 묘지명은 「정헌묘지명」에서 그의 천재성과 관련된 이야기 몇 편을 실어놓았다. 이야기성을 위해 본문의 내용을 편집했다.

정약용은 이가환이 시詩에도 밝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당·송·원·명의 시는 물론이고 한국의 시도 모두 외우고 있어서 웬만해서는 그를 속일 수 없었다. 한 번 그의 조카 허질許瓆이 중국과 한국의 역대 시집을 가지고 시를 뽑아서 종일 물어도 한번도 틀리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허질이 중국의 시문체를 모방해 시를 한 수 지어다가 어느 시대 누구의 시냐고 물어보았다. 이가환이 한동안 보고 말했다.
"이거 개새끼[犬子]의 시구만!"
"정말 귀신이시네요. 어떻게 제가 지은 걸 아셨어요?"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러 학사들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소동파의 주행시舟行詩에 특이한 시구가 있는데, 지금 다 잊어버려서 한두자도 외울 수 없으니 한스럽구려."
이가환이 되물었다.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暗潮生渚 보이지 않는 조류는 물 가에서 생기고
落月挂柳 지는 달은 버들가지에 걸렸다
는 시 아닌가?"
"대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분입니다!"

한 번은 정약용이 소보邵寶의 글을 보다가 모르는 글자가 나왔다. 정약용이 열심히 찾아봤지만 자전字典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글자였다. '이거면 이가환을 곤혹스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찾아가서 물었다. 그런데 어렵쇼.
"그 글자 자전을 다 찾아도 안 나오네. 자네 소보의 글을 본 것인가? 내가 마침 기억하고 있다네"
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이 하나도 안 틀리고 외우고, 거기에 덤으로 용례를 찾아내서 음까지 유추해 내서 정약용이 더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천재도 별 수 없었던 것이 『주역』인 모양이다. 정약용은 이가환을 찾아가 『주역』에 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정약용: 다른 경서들은 통달했지만 『주역』은 알 수 없으니, 어찌하면 알 수 있습니까?
이가환: 나는 『주역』은 평생 동안 연구하여도 알지 못할 글로 이미 판단했으니 묻지 말게.
정약용: 이익[星翁]의 『역경질서易經疾書』는 어떻습니까?
이가환: 우리 집안의 책어서 열심히 읽었지만 역시 『주역』은 알 수 없었네.
정약용: 이병휴[貞山]의 『역경심해易經心解』는 어떻습니까?
이가환: 역시 우리 집안의 책이어서 열심히 읽었지만 역시 『주역』은 알 수 없었네.
정약용: 내지덕[來矣鮮]의 『주역집주周易集注』는 어떻습니까?
이가환: 역시 『주역』은 알 수 없었네.
정약용: 오징吳澄의 『역찬언易纂言』은 어떻습니까?
이가환: 역시 『주역』은 알 수 없었네.
정약용: 주진한朱震漢의 『상역上易』은 어떻습니까?
이가환: 역시 알 수 없었네.
정약용: 이정조李鼎祚의 『주역집해周易集解』는 어떻습니까?
이가환: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비하면 조금 낫지만 역시 『주역』은 알 수 없었네.

이어서 이가환은 『주역』과 관련된 수십명의 설을 열거하면서, "모두 보았지만 『주역』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덤으로 정약용에게는 이렇게 충고했다.

자네는 『주역』에 뜻을 두지 말게. 무릇 역학易學이라는 것은 흐리멍텅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 자네같이 총명한 사람은 절대로 역학을 배울 수 없네. 저 궁벽한 시골에 평생 동안 『주역』을 읽고서 드디어 노주역盧周易이니 최주역崔周易이니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자네도 이런 무리가 되려는가?

처음에 이가환의 이 얘기를 읽을때는 웃었는데, 정작 『주역』을 읽어보면 이 이야기에 웃을 수가 없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정병석의 번역본(을유문화사. 2010~2011. 전2권)과 정이천의 주석본을 번역한 심의용 번역본(글항아리. 2015)인데, 뭘 읽어도 머릿속이 아득해 지는 것은 별 수 없다........OTL

덧: 교수님께 이 얘기를 했더니 교수님께서 "그건 그냥 머리 좋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경륜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사학을 하는 이상 경학經學을 피할 수는 없으니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전부 다 이해하려 들지는 말아라"고 하셨다. 그래서 공자가 50 넘어서 『주역』을 공부했던 건가........;;;;;


덧글

  • 함부르거 2016/07/31 06:22 #

    주역과는 조금 궤가 다르지만 20대 때는 음양오행론을 아무리 파도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니까 어느 순간 확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암튼 이쪽 공부가 그런 면이 있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6/07/31 22:18 #

    일단 지금의 저로서는 읽어보면 뭔가 그럴싸 한 것 같은데 아득한 곳을 헤메게 됩니다아아아......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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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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