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칠천량 해전 재구성과 관련하여 by 연성재거사

오랜만에 쓰는 『징비록』 관련 연재글. 하지만 기대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게 함정

유성룡의 『징비록』이 신뢰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패전한 정황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징비록』을 보면 탄금대 전투를 비롯해 조선군에게 망신스러운 전투였던 용인 전투나 칠천량 해전의 패전도 모두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이 있는 그대로 적힌다기 보다는 사건이 기록자에 의해 재구성된 상태로 적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게 재구성된 것이 사실과 인과관계가 얼마나 맞아 떨어지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징비록』의 칠천량 해전과 관련해서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실, 칠천량 해전은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함대 사령관이었던 원균이 부적격한 인물인 것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일본의 반간계와 조선조정의 오판이 있었다. 이 일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을 통제사에 앉혔고, 그는 병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전에 3편의 글을 썼었다. 이순신의 해임과 관련해 유성룡이 『징비록』 초고에 썼던 글[링크], 칠천량 해전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링크], 그리고 이순신의 해임과 관련해 가장 처음 작성되었던 『난후잡록』에 기록[링크]까지 말이다. 이를 쓰면서 "『난후잡록』→초본 『징비록』→간행본 『징비록』"으로 기록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유성룡이 선조를 의식해 처음에 쓴 기록을 상당히 다듬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기록을 다듬는 과정을 통해 칠천량 해전의 책임이 다른 곳에 옮겨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칠천량 해전 패전의 원인 중 하나는 조선 조정의 지휘관 교체였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한 사람의 비중을 지나치게 높게 잡는 것은 무리이지만, 적어도 조선 조정이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이순신을 해임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의 해임 배경에 요시라要時羅를 이용한 일본의 반간계가 흔히 언급되지만, 이민웅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순신의 파직 및 체포는 반간계보다는 선조의 오판에 의한 내부적 상황이 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임진왜란 해전사』(이민웅. 청어람미디어. 2004) p.178 참고
여기서 유성룡이 이 사건을 어떻게 재구성했나 보자.

逮統制使李舜臣, 下義禁府拷掠, 減死論充軍. 時賊久住海邊, 詐言請封於天朝, 得請, 則當渡海, 先撤西生浦賊將淸正等軍以示信. 天使楊方亨往日本, 而平秀吉旣更封, 猶不撤兵, 再遣淸正, 還屯西生, 未至. 倭將平行長在釜山浦, 使卒倭要時羅, 來右兵使金應瑞陣, 密言 "行長與淸正, 爭功有隙. 今此和事不成, 亦淸正敎關白敗之. 今淸正來時, 船上當有某樣旗號. 朝鮮善水戰, 若邀之海中, 則淸正可擒, 而行長之怨除矣" 應瑞上其事, 朝廷多疑之. 海平府院君尹根壽, 素輕佻踴躍, 請如應瑞言. 在備邊司議不合, 則屢至承政院, 獨啓盛言 "機不可失", 上輒下其議. 是時元均爲忠淸道兵使, 與舜臣搆隙, 必欲陷之. 上疏言邊事, 語多侵舜臣. 以爲逗留, 均多內助, 上褒獎之, 以爲忠勇增秩爲資憲, 賜內廐馬, 復爲全羅兵使, 寵眷日盛. 舜臣平生不能事左右, 且爲余所薦, 李等以惡余之, 故必欲擠舜臣. 內外合勢, 論謗藉藉, 遂令舜臣率舟師, 往邀淸正於釜山前洋. 舜臣疑行長言不可信, 朝廷促之不已, 不得已遂引兵船前進. 而淸正已於數日前, 還泊西生浦, 我舟師至絶影島而回. 蓋倭人曾敗於舟師, 而舜臣久住閑山, 行長欲知多寡虛實, 故爲此語, 以誑之耳. 行長又使要時羅來言于應瑞曰 "吾念朝鮮舟艦甚盛, 今特孤弱耳" 事聞上震怒, 以爲舜臣臨機不進失誤軍機, 將加重罪, 而以元均代之. 余以爲統制使非舜臣不可, 今事急而易將, 使閑山不守, 則湖南不可保, 執爭之. 上愈怒謂備邊司 "依阿不直" 諸臣皆懼. 余以國事成敗至重, 猶力言之數日, 上命余出巡京畿郡邑, 而引見宰臣, 諭舜臣之罪. 且曰 "我國亦有石星, 故舜臣恃此而然耳" 其時中朝石星, 兵部尙書主邊事權重, 故敎之, 聞者慄縮. 旣退而左相金應南等請逮捕舜臣鞠問, 元均代爲統制使.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하옥하여 고문했다가 사형에서 감해 충군하였다. 이때 적은 오랫동안 해변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였고, 먼저 서생포의 적장 가토 기요마사 등의 군을 철수시켜 신의를 보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이 일본에 건너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책봉을 받았지만 오히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재차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보내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게 했는데 아직 조선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 있었는데, 군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에 보내 은밀히 말했다. "고니시와 가토는 공을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 이 화친이 성립되지 않으면 (고니시는) 또 관백이 가토의 계책을 따르게 되어 (가토에게) 패하게 됩니다. 지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때, 배 위에는 당연히 가토를 표식하는 모양의 깃발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은 해전을 잘하니 만약 바다에서 맞아 친다면 (조선은) 가토를 잡고 고니시는 원한을 덜 것입니다"
김응서가 이 일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는 부질없이 경박하게 행동하며 김응서의 말을 쫓을 것을 청했다. 비변사에서 논의가 결론을 내지 못하자 (윤근수는) 여러차례 승정원에 나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했으나 임금께서 여러차례 그 의견을 기각하셨다.
이때 원균이 충청병사에 있으면서 이순신을 헐뜯으며 틈이 벌어저 기필코 이순신을 모함하고자 하였다. 원균이 변방의 일을 상소하면서 이순신을 공격했다. 원균이 밖에 오래 머물면서도 내조가 많아 임금께서 포장褒獎하면서 충용스럽다고 하시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작위를 더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셨다. 다시 전라병사가 되어서는 총애가 날로 더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평생 좌우에 아첨하지 않고 내가 천거했기 때문에 이산해 등은 나를 미워하여 이순신을 배척하고자 하였다.
안밖에서 합세하여 논의와 비방이 쌓여, 마침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가서 가토를 맞아 공격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말이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조정에서 끊임없이 재촉하여 부득이하게 수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하지만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돌아와 서생포에 정박했고, 아군은 절영도絶影島에서 돌아왔다. 대개 왜인들이 우리 수군에게 계속해서 패했고, 이순신이 한산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자 고니시는 아군의 군세와 허실을 알고자 이렇게 말해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에게 "나는 조선의 수군이 매우 성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만 외롭고 약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을 들은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이순신이 기회를 맞아 나가지 않아 아군의 기회를 그르쳐 실패했다면서 중죄를 더하고 원균에게 통제사의 직위를 대신하게 하라고 했다. 나는 통제사의 자리에 이순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앉힐 수 없고, 지금 사세가 급한데 장수를 바꾸어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 호남을 지킬수 없다고 의논을 모아 간쟁하였다. 임금께서 더욱 화를 내시면서 비변사에게 "권세에 의지해 아부하며 올곧지 못하다"고 하셨고, 이에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나는 나랏일의 성패가 중대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수일동안 힘써 아뢰었지만, 임금께서 나는 경기 지역의 고을들을 순시하도록 보내고 재신들을 인견하여 이순신의 죄를 유시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에도 역시 석성石星이 있다. 그러니 이순신이 믿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명나라 조정에서 석성이 병부상서로 국방의 일을 주관하여 권세가 막강하였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듣는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임금께서 나가시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등이 이순신을 체포하여 국문하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난후잡록亂後雜錄』)

逮水軍統制使李舜臣, 下義禁府獄拷問, 削其官, 白衣從軍. 初元均德舜臣來救, 相得甚懽, 旣而, 爭功, 漸不相能. 均性險詖, 且多連結於中外, 搆誣舜臣, 不遺餘力, 每言 "舜臣初不欲來, 因我固請, 乃至, 勝敵我爲首功" 時朝論分岐, 各有所主, 以舜臣初爲余所薦, 不悅余者, 與元均合攻舜臣甚力. 惟右相李元翼明其不然, 且曰 "舜臣與元均, 各有分守之地. 初不卽進, 未足深非" 先是, 賊將平行長, 使卒倭要時羅, 往來慶尙右兵使金應瑞陣, 致慇懃. 方淸正欲再出也, 要時羅密言於應瑞曰 "我將行長言 '今此和事不成, 由於淸正, 吾甚疾之. 某日, 淸正當渡海, 朝鮮善水戰, 若要諸海中, 可以敗殺, 愼毋失也.'" 應瑞上其事, 朝廷信之. 海平君尹根壽尤踊躍, 以爲機會難失, 屢啓催舜臣進兵, 項背相望. 舜臣疑賊有詐, 遲徊者累日. 蓋賊從對馬島得順風, 半日到釜山, 而我軍在閑山島, 冒逆風行船, 非數日不達. 所經加德之城及岸上, 處處賊營, 船無止泊處. 賊累不利於舟師, 以計誤我, 而人不悟. 至是, 要時羅又至曰 "淸正今已下陸, 朝鮮何不要截?" 佯致恨惜之意. 事聞, 朝議皆咎舜臣, 欲罪以逗留失機, 以元均代舜臣. 余持其議, 不行數日, 以命出巡京圻, 而臺諫請拿鞫舜臣, 備邊司助之. 慶尙道玄風儒朴惺者, 亦承望時議, 上疏極言 "舜臣可斬" 遂遣義禁府都事, 逮捕以來, 元均自全羅兵使爲統制赴閑山.
수군통제사逮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체포하여 의금부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다가 관직을 삭탈하고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와서 자신을 구하여 준 것을 고맙게 여겨 둘의 사이가 매우 좋았지만 점차 공을 다투어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다. 원균은 성격이 음험하고 비뚤어졌는데 조정과 지방에 관계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니, 이순신을 비방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이순신이 처음에 구원하러 오려 하지 않다가 내가 강하게 요청하니 그제서야 왔으니, 적을 물리친 첫째가는 공은 나에게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조정의 논의가 나누어져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 원래 나였기 때문에, 나를 기꺼워하지 않는 자들은 원균과 더불어 극력으로 이순신을 공격하였다. 오로지 우의정 이원익李元翼만이 당시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이순신과 원균은 각자 지키는 지역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순신이 즉시 원균에게 가지 않은 일을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군 졸병 요시라要時羅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왕래시키며 정성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재출병하려 하였는데,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비밀히 "우리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씀하시기로는 '지금 이 화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으로 내가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다. 아무 날에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널 것인데 조선은 수전水戰을 잘 하니 만약 그때 바다 위에서 공격하면 그를 패배시키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김응서가 이 일을 보고하자 조정은 그 말을 믿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는 가장 뛸 듯이 기뻐하여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임금께 이순신에게 진군하라고 하여 (재촉하는 사자가 한산도에) 빈번하게 왕래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이 속임수를 부리고 있을 것을 의심하여 며칠 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대개 적은 대마도로부터 순풍을 타고 반나절만에 부산에 건너오는데 반해 아군은 한산도에 주둔해 있다가 역풍을 헤치며 항해해야 하니 수일이 지나도 이르지 못할 것이 아닌가. 또 가덕도加德島로 가는 길에 있는 성과 해안가에는 곳곳에 적의 진영이 있어서 우리 전선이 머물고 정박할 곳이 없었다. 적이 계속해서 우리 수군을 이기지 못하자 계략을 써서 아군을 오도誤導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에 요시라가 다시 와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상륙하였습니다. 조선은 왜 가토 군을 공격하여 차단하지 않았습니까?"하며 거짓으로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이 소식이 들리자 조정의 논의는 모두 이순신이 시기를 놓친 것의 죄를 묻고 원균을 이순신을 대신하게 하고자 하였다. 내가 그 논의를 막아 며칠동안 시행되지 않았으나 명령을 받아 경기지역을 순시하러 나가자 대간臺諫에서는 이순신을 잡아서 심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비변사도 이에 동조했다. 경상도 현풍玄風의 선비[儒]인 전前 현감 박성朴惺도 당시의 논의에 따라 상소하여 "이순신을 처형하여야 합니다"라고 극언極言을 했다. 마침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원균을 전라병사에서 통제사로 임명하여 한산도에 부임하게 했다.
(초본 『징비록』)

逮水軍統制使李舜臣下獄. 初元均德舜臣來救, 相得甚歡, 旣而, 爭功, 漸不相能. 均性險詖, 且多連結於中外, 搆誣舜臣, 不遺餘力, 每言 "舜臣初不欲來, 因我固請, 乃至, 勝敵我爲首功." 時朝議分岐, 各有所主. 薦舜臣初爲余, 不悅余者, 與元均合, 攻舜臣甚力. 惟右相李元翼明其不然, 且曰 "舜臣與元均, 各有分守之地, 初不卽進, 未足深非" 先是, 賊將平行長, 使卒倭要時羅, 往來慶尙右兵使金應瑞陣, 致慇懃. 方淸正欲再出也, 要時羅密言於應瑞曰 "我將行長言 '今此和事不成, 由於淸正, 吾甚疾之. 某日, 淸正當渡海, 朝鮮善水戰 若要諸海中, 可以敗殺, 愼毋失也.'" 應瑞上其事, 朝議信之. 海平君尹根壽尤踊躍, 以爲機會難失, 屢啓之, 連催舜臣進兵. 舜臣疑賊有詐, 遲徊者累日. 至是, 要時羅又至曰 "淸正今已下陸, 朝鮮何不要截?" 佯致恨惜之意. 事聞, 廷議皆咎舜臣, 臺諫請拿鞫, 慶尙道玄風人, 前縣監朴惺者, 亦承望時論, 上疏極言 "舜臣可斬." 遂遣義禁府都事, 拿來, 元均代統制使.
수군통제사逮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와서 자신을 구하여 준 것을 고맙게 여겨 둘의 사이가 매우 좋았지만 점차 공을 다투어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다. 원균은 성격이 음험하고 비뚤어졌는데 조정과 지방에 관계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니, 이순신을 비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이순신은 처음에 (구원하러) 오려 하지 않다가 내가 강하게 요청하니 그제서야 왔으니, 적을 물리친 첫째가는 공은 나에게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조정의 논의가 나누어져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 원래 나였기 때문에, 나를 기꺼워하지 않는 자들은 원균과 더불어 극력으로 이순신을 공격하였다. 오로지 우의정 이원익李元翼만이 당시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이순신과 원균은 각자 지키는 지역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순신이 즉시 원균에게 가지 않은 일을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군 졸병 요시라要時羅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왕래시키며 정성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재출병하려 하였는데,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비밀히 "우리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씀하시기로는 '지금 이 화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으로 내가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다. 아무 날에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널 것인데 조선은 수전水戰을 잘 하니 만약 그때 바다 위에서 공격하면 그를 패배시키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김응서가 이 일을 보고하자 조정은 그 말을 믿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는 가장 뛸 듯이 기뻐하여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임금께 이순신에게 진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이 속임수를 부리고 있을 것을 의심하여 며칠 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요시라가 다시 와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상륙하였습니다. 조선은 왜 가토 군을 공격하여 차단하지 않았습니까?"하며 거짓으로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이 소식이 들리자 조정의 논의는 모두 이순신을 책망하였고 대간臺諫에서는 이순신을 잡아서 심문할 것을 요청하였다. 경상도 현풍玄風 사람인 전前 현감 박성朴惺도 당시의 논의에 따라 상소하여 "이순신을 처형하여야 합니다"라고 극언極言을 했다.
마침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징비록』 권2)

처음 『난후잡록』에 기록할 때는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오는 것을 주도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징비록』으로 정리하면서 선조의 역할 대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정황이 강조되고, 선조가 원균을 총애한 부분도 편집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반간계에 넘어가서 이순신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여론이 형성된 것으로 서술되었다.
이런 서술의 변화는 조선의 지식이 생성/유포되는 단계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국가원수인 국왕을 의식해야 했고, 그에 따라 아량이 부족하고, 불공정한 동시에 지나친 승벽이 있었던 선조의 책임을 묻는 부분은 대부분 지워지고 '여론에 못이겨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처럼 보이도록 변했다. 그리고 그 여론도 일본의 반간계와 원균의 모함에 넘어간 것으로 그려졌다. 오판을 했던 관료들의 출신이 한정적이었고, 그들 내에서의 '룰'을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고 난독증 시전하면 안된다.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정황은 『선조실록』을 통해 교차검증된다. 그것도 꽤 여러 사람이 증언을 남겼다.

사실, 칠천량해전의 경우 제일 큰 실책을 저지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반간계에 넘어가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 초 계속된 승전으로 조선 조정은 "조선 수군이 적보다 강하다"고 판단해버렸고, 강화회담이 질질 끄는 동안 이순신이 칠천량을 봉쇄하는 현존함대전략으로 대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에 인물에 대한 오판이 더해지면서 자질 이하의 인물을 사령관 자리에 앉혀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잠깐 손무의 조언을 들어보자.

故知勝者有五. 知可以戰與不可以戰者勝. 識衆寡之用者勝. 上下同欲者勝. 以虞待不虞者勝. 將能而君不御者勝. 此五者, 知勝之道也.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따라서 전쟁의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다섯가지가 있다. 싸울 수 있는 경우와 싸워서는 안 될 경우를 아는 자가 승리한다.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의 사용법을 아는 자가 승리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목적이 같은 쪽이 승리한다. 불우의 상황에 대비하는 자가 대비하지 않는 자를 이긴다.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제어하지 않는 쪽이 승리한다. 이 다섯가지가 승리를 미리 아는 비결이다. 그런 까닭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의 사정만을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손자병법』 《모공謀攻》)

조선 조정은 여기서 손무가 말한 교훈을 모두 망각했다. 왕과 신하들이 수군의 작전권에 간섭하고 견제했고, 이순신의 선례를 봤던 원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에 본인의 업보도 덤으로 있었지만ㅡㅅㅡ 그렇게 조선군은 싸워서는 안될 해역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병력에 따른 전술변화를 놓쳤고, 불우의 상황은 고사하고 예측이 가능한 일본군의 전략과 상황도 모두 놓쳤다. 무리한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불우한 상황에 휘말린 조선군은 지쳐버렸고, 기초적인 경계도 실패했다. 손무가 경고했던 상황이 모조리 벌어졌고,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지난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뒷날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시경』 구절을 인용하며 "당시의 사적을 버리지 않고" 기록하여 자신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했고, 7년전쟁에 관해 『징비록』을 읽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취지로 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징비록』의 서술을 검토해 보면 유성룡이 사건을 서술하면서도 그 가운데서 자신의 주제를 풀어내고 있으며, 기록과 사건의 재구성에서 당시 지배계급 사이에서 출판과 기록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룰'을 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부분에 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덧글

  • 아빠늑대 2015/12/19 01:52 #

    이런 이야기 암만 들어봐야 지금도 한국땅 어디에서는 "선무일등공신 원균공"에 대한 문화제를 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으니, 나날이 회의론자로 변하게 됩니다.
  • 연성재거사 2015/12/19 12:48 #

    아................그거...................ㅡㅡ;;;
  • 까마귀옹 2015/12/19 09:11 #

    오타 지적. '요시라'를 '요리사'로 적으셨습니다(...).

    칠천량 해전 직전에 일어난 일중 유명한게 도원수 권율이 원균 잡아다가 곤장으로 조진 일이 있지요. 원균 옹호론자들은 이 걸 가지고 '권율 때문에 원균이 할 수 없이 출전했다가 패했으니 권율에게도 패전의 책임이 있다능!'이라고 주장하지요.

    이에 대한 권율의 항변:'수군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자가 부산과 가덕을 치겠다는 장계를 올려? 그 핑계로 이순신을 내쳤으니 그 다음은 뭔가? 육군이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서 부산과 가덕을 치지 못한다고 이번에는 나 도원수 권율도 내칠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난 이순신처럼 순수한 자는 아니야.'
    (불멸 때의 대사 그대로임. )

    이 곤장질엔 권율의 개인적인 화풀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권율도 그 작전이 바보짓이라는 것을 모를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선조와 조정에게 반항할 수는 없으니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원균을 대신 조지기.
  • 연성재거사 2015/12/19 12:50 #

    오타 고쳤습니다. 한자는 똑바로 썼는데 정작 한글을 틀렸군요. (...)

    솔직히 원균이 해 놓은 걸 보면 곤장이 아니라 파직에 콤보가 붙어야 어울리죠. ㅡㅅㅡ
  • 바탕소리 2015/12/19 13:51 #

    군사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관료들이 군사적 문제에 개입하면 안 되죠.
    반대로 군사 행동에 참여하는 장군들이 비군사적 문제에 개입해서도 안 되고요.

    선조 및 중앙 관료들과 정확히 반대의 사례가 더글러스 맥아더일 듯합니다.
    전쟁을 마음대로 확대시키기 위해 외교 문제까지 손을 대려다가 짤렸죠.
    다행인 건 매튜 리지웨이는 원균이 아니었다는 거지만.
  • 연성재거사 2015/12/23 23:15 #

    전근대 동양에서 무관들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 문관중심의 정치를 했던데 다 이유가 있죠.
  • 까마귀옹 2015/12/19 17:02 #

    맥아더보다 더 심각한 작자들이 있지요. 옆동네 옛 일본군과 구 독일 제국군 인사들 말입니다.
  • 바탕소리 2015/12/19 18:41 #

    연성재거사// 그렇지요.
    까마귀옹// 그러니까 맥아더가 있는 미국한테 털린 것 아니겠습니까. ㅋㅋㅋ
  • 위장효과 2015/12/19 15:41 #

    "나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라 하고 나가지 않아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라고 한다." 이건 손자병법에서도 꽤나 되풀이되면서 나오는 문구입니다. "장수는 전장에 나갔을 때 군주의 명을 받지 않는다."라는 손자병법의 다른 문구하고도 일맥상통하지요.

    그런데 이건 아무리 명군이라 해도 지키기 어려운 문제인데, 대표적인 명군인 한 경제나 청 옹정제-이쪽은 강력한 독재자에닥 워커홀릭-조차도 휘하의 유능한 장수들을 쓸데없이 의심해서 죽여버렸지요-전자는 주아부를 후자는 연갱요를 그렇게 제거했는데, 주아부나 연갱요나 자신들의 공적을 믿고 오만하게 굴었던 게 자신들의 명줄을 당긴 원인이었지만 두 황제 역시 잘못한 건 있단 말이죠-게다가 한 경제의 경우에는 선친인 문제가 주아부를 어떻게 평가했었던가와 비교가 되니까 더더욱. 문경지치라고 하긴 하는데 아무리 봐도 경제는 아버지보다 좀 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오초칠국의 난의 간접적 원인 하나가 바로 황태자시절 성질머리 다스리지 못한 것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니.

    손자병법의 저 대목으로 인하여 현대의 인물중 대차게 까인 인물이 바로 콧수염 힛통이고 그 다음으로 까인 게 강철남과 처일곱영감님...(뭔가 활약한 시대가 동일하다는...). 손무의 저 경고를 현대화한 게 바로 새뮤얼 헌팅턴의 객관적 통제-이른바 정상 이론-이긴 한데 네오콘의 브레인이었던 엘리엇 코언 같은 인물은 오히려 링컨, 클레망소, 처칠, 벤구리온등의 예를 들면서 최고 권력자가 적절하게 감시하고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죠. 반대로 배리 피트같은 경우는 그의 저서 제 2차 세계 대전사에서 손무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독일육군참모본부에 대한 비판내용이 그렇습니다.)

    덧: 여기 배교행위를 참회하고 여신님의 품으로 돌아온 집나간 어린양이 있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5/12/19 16:41 #

    중앙에서 굵게 가이드라인만 잡아주는 것은 좋은데, 이것 이상으로 나가면 곤란해지죠.

    PS)...................................................
  • 까마귀옹 2015/12/19 17:00 #

    극과 극은 통한다고, 위의 바탕소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군부가 비군사적인 문제까지 개입하려 들면 또 큰 문제가 터지지요. 민주주의의 필수요소 중 '문민통제'가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손자병법에서는 이 '문민통제'에 대한 언급은 없군요.
  • 홍차도둑 2015/12/20 09:52 #

    위장효과 님/다음글을 보셔야ㅜ합니다!!!

    까마귀옹 님 / 손자병법에 문민통제로 해석될 구절 있습니다. 위정자라는 단어 및 "이전에 생각" 이라고 되어있고. 그 외에도 다른 부분이 문민통제로 해석될수 있고 그러한 절차급인 부분들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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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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