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와 당태종의 치세, 리더십 by 연성재거사

서양에서 리더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이 꼽힌다면, 동양에서는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지목된다. 이 『정관정요』는 당 중종 무렵, 사관史官이던 오긍吳兢이 당태종의 치적을 모아서 편찬한 책으로, 정관貞觀은 당태종 연간의 연호年號(626~649)이다. 당태종에 대해 현대 한국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인식이 좋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당태종을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明君으로 지목한다.
유교의 영향이 강해 인륜人倫을 중시하는 동북아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태종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현무문玄武門의 변으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를 유폐하고 제수를 첩으로 삼았다. 이렇게까지 인륜을 어기고서 칭송의 대상이 된 황제는 없다.

당태종의 초상. 그의 치세가 과장된 측면은 분명히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매우 능력있는 황제였다는 것이다.

사실, 태평성대의 대명사가 된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분명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당태종 연간에 당은 안으로는 지속적인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대외적으로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돌궐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그의 치적은 유토피아처럼 여겨지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당태종이 돌궐을 토벌하고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얻으면서 유목민족이 중원왕조에 가하는 위협을 제거한 동시에 수나라 말의 혼란을 정비하고 수의 제도를 토대로 당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시기였다. 그것이 그의 치세가 높게 평가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본론으로 넘어가서 『정관정요』를 읽어보자. 사실 이 책은 당태종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면이 있다. 『정관정요』에 묘사된 당태종은 끊임없이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자책하는 성군聖君이지만, 실제로 그는 넘치는 카리스마와 관찰력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이런 당태종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이 644년, 고구려 원정 직전에 있었다.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당태종은 수양제 때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던 정원숙鄭元璹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

前宜州刺史鄭元璹, 已致仕. 上以其嘗從隋煬帝伐高麗, 召詣行在, 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運艱阻, 東夷善守城, 攻之不可猝下."
전前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이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황제께서 그가 일찍이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갔었기 때문에 행재소로 불러 고구려 원정에 대해 물었다. 정원숙이 답하였다. "요동遼東은 길이 멀어 군량을 운송하기 어렵고, 동이東夷는 수성전守城戰에 능하기 때문에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자치통감』 《당기唐紀》13 정관 18년(644) 11월)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경험자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반대의견이 나온 것이다. 이때 보통(또는 그 이하)의 리더들은 키배설전을 벌이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길한 소리를 한다고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러나 당태종은 달랐다.

上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금일今日은 수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공은 그저 따르기만 하라."
(『자치통감』 《당기唐紀》13 정관 18년(644) 11월)

당태종 그 자신부터 군사적·정치적 감각이 탁월했고, 그는 이 능력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이 일화는 그런 면모를 굵고 짧게 보여준다.

그러면 『정관정요』가 보여주는 모습은 당태종의 일부분만 보여주는 환상이란 말인가? 아니다. 『정관정요』가 집어낸 "직언을 받아들이는 황제"의 모습은 리더십에서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바로 "어떤 사람을 참모진에 앉히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고 해도 판단착오를 하거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평점심을 잃거나 무언가에 쫓길 때, 잘 나가다가 실패를 경험하면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 해도 판단력이 흐려진다. 리더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막아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참모진이다. 그런데 당태종처럼 리더가 카리스마가 강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으면 참모들이 리더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들이 모두 유능하다 해도, 이런 식으로 '코드'가 비슷한 사람들로 채워지면 리더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제어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당태종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은 그가 이것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당태종에게 간언을 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인물이 생전에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위징魏徵(580~643)이다.

위징의 초상. 명석했지만 당태종과 코드가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끝까지 우대하였다.

위징은 여러모로 당태종과 코드가 다른 인물이었다. 위징은 원래 수나라 때 수재과* 출신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수재과 출신답게 학식도 풍부해 당고조는 그를 태자(이건성)의 스승으로 삼았고, 나중에 당태종 때는 『수서隋書』를 비롯한 역사서와 『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의 편찬사업 때마다 책임을 맡은 인물이다.
* 수재과는 과거시험의 한 종류로, 말 그대로 "수재들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수재'를 선발해야 하다보니 난이도가 매우 높았고, 제대로 변별해내지 못하면 시험관들의 평판과 인사고과가 나빠지기 때문에 수험생과 시험관 모두 꺼리는 시험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만 봐도 위징이 얼마나 실력있는 인물인지 감이 갈 것이다.
이렇게 가방끈이 길고 아는게 많은 사람들은 시도때도 없이 시시콜콜 따지고, 머리가 명석하다 보니 그만큼 자존심이 있어 기가 죽지도 않는 경우가 많은데, 위징이 딱 그랬다. 이세민과 권력을 다투던 태자 이건성의 사부였을 때도 수시로 잔소리를 해대서 건성이 제일 싫어하던 인물이었고, 정변에서 승리한 이세민이 위징을 심문하면서 "니가 건성에게 나를 먼저 치라고 했다면서?"라고 했을 때도 "태자께서 내 말 들었으면 당신이 먼저 죽었을 것이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당태종은 이런 위징을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말은 쉽지만, 자신과 성향이 다르고 수시로 잔소리를 하는 인물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매일같이 이런 일을 꿋꿋이 견딜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은데, 당태종은 이를 극복했다. 당태종은 그 자신이 능력이 있었고,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휘어잡았지만 동시에 자신과 "코드"가 다른 인물들도 등용했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그들의 의견을 끌어내는 데 사용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위징인 것이다.
당태종의 카리스마 있는 면모보다도 이런 모습이 더 남아서 『정관정요』에 기록된 것은 단순히 신하들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은 황제의 권력이 워낙 강해 황제가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인물들로 주변을 채우기 쉽다. 어쩌다가 황제와 "코드가 맞지 않는" 인물이 참모가 되어 황제의 의견에 반대해도, 황제가 마음에 안들면 퇴짜를 놓기 쉬운 구조이다. 그렇다고 황제의 권력에 제제를 가할 정치제도를 구상하기는 힘든 노릇. 일단 살아야지 그렇기에 권력을 쥔 황제들이 보여주기 어려운 "자신과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참모로 쓰고, 그들의 의견을 포용하는" 모습의 이미지가 부각되어 『정관정요』가 쓰여진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관정요』는 리더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로 거론된다. 당태종의 치세가 그렇게 태평성대도 아니었고, 『정관정요』가 당태종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주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인물들을 참모로 삼아 조직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리더들에게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리더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고독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성취에 불만족스럽기 시작하면 주변 참모들을 고분고분한 사람, 자신을 위로해주는 사람, 자신을 잘 아는 사람으로 채우려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리더십에는 수많은 덕목이 요구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잘못된 판단을 잡아줄 참모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걸 이겨냈기에 당태종은 중국사를 대표하는 성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집어낸 『정관정요』는 제왕학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

어질고 선한 군주라야 깨우치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지혜로운 군주라야 언제나 진언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태종은 하늘이 내린 지혜와 용맹으로 손수 천하를 평정하고 모든 일과 기틀을 결정하면서도 번번이 빠뜨리는 계책이 없었으니, 마땅히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에 신하들 가운데 충분히 그 뜻에 맞추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모아 받아들이며 오직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했으니, 다만 간언을 받아들인다는 명성만 넓힌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정사에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중략)......한 사람의 눈과 귀에는 한계가 있고, 생각은 두루 미치기 어려우니, 여러 생각을 모아 이로움을 확대시키지 않으면 올바른 통치를 얻기가 어렵고, 잘못을 꾸미며 간언을 거부하면 단지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될 것임을 깊이 알았던 것이다.
(조익趙翼.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정관 연간에 올바르게 간언한 사람은 위징만이 아니었다[貞觀中直諫者不止魏徵]」)

마지막은 막둥이 여신님 오하영으로 마무리 ㄳ

덧글

  • Masan_Gull 2015/11/01 01:08 #

    우리에게도 명군이죠. 요동성에서 고구려에게 신나게 대줬으니까!
  • 연성재거사 2015/11/01 08:46 #

    안시성이겠죠.
  • Masan_Gull 2015/11/01 11:42 #

    아차;; 요동지방이라고 했었어야 하는군요ㅠ
    안시성은 맞는건가요? 양만춘(?)은 가공의 인물일 수도 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 연성재거사 2015/11/01 11:46 #

    양만춘은 실존 여부가 애매하지만, 안시성은 확실합니다.
  • asianote 2015/11/01 06:47 #

    이건승이 아니라 이건성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죽인 정도가 아니라 조카들까지 아예 몰살...
  • 연성재거사 2015/11/01 08:46 #

    고쳤습니다. (피곤하니 이런 실수를......;;;)
  • 까마귀옹 2015/11/01 11:16 #

    1.당 태종의 업적이 워낙 크다 보니 역으로 고구려 원정의 실패란 실책도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 잘해 놓고 안시성에서 그런 수모를 당해서 수백년 후 쿠빌라이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까지 했지요. 위에 나온 위징에 대해서도 유명한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 일(고구려 침공)을 끝까지 막았을 텐데......"

    2. '이렇게까지 인륜을 어기고서 칭송의 대상이 된 황제는 없다.'
    그러고 보니 후대의 조선에도 이런 임금이 있군요. (물론 수양대군 말구요.)
  • 연성재거사 2015/11/01 11:25 #

    1. 실제로 말년의 태종도 독선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여러 실책을 저질렀으니까요.

    2. 사실 조선이고 당나라고 '태종'이라는 인물이......ㄷㄷㄷ
  • BigTrain 2015/11/01 12:00 #

    말년에 살짝살짝 아쉬운 모습을 보인 걸 보면 딱 오십 정도에서 돌아간 게 적당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십 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현종 꼴이 났을 지도요.
  • 연성재거사 2015/11/01 12:08 #

    그런데 그러기엔 고종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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