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이 1597년 이순신에 대해 원래 기록했던 내용 by 연성재거사

이순신의 체포와 하옥에 관한 『징비록』의 편집 내가 예전에 썼던 글에서 트랙백

예전에 1597년에 있었던 이순신의 체포와 관련해서 『징비록』이 간행되면서 초고로 쓰여졌을 때와는 달리 편집된 것을 포스팅했었는데, 『난후잡록亂後雜錄』을 읽어보니 정도가 훨씬 더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쓰기 전부터 여러가지 7년 전쟁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었는데, 이를 『징비록』과 잘 비교해 보면 유성룡이 어떻게 기록을 다듬으면서 『징비록』을 써 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대목도 그 중 하나이다. 어조나 내용이 상당히 많이 편집된 것을 알 수 있다.
(※ 『난후잡록』은 『서애전서』(1991. 전 4권) 3권에 수록된 판독문을 저본으로 삼았다.)

逮統制使李舜臣, 下義禁府拷掠, 減死論充軍. 時賊久住海邊, 詐言請封於天朝, 得請, 則當渡海, 先撤西生浦賊將淸正等軍以示信. 天使楊方亨往日本, 而平秀吉旣更封, 猶不撤兵, 再遣淸正, 還屯西生, 未至. 倭將平行長在釜山浦, 使卒倭要時羅, 來右兵使金應瑞陣, 密言 "行長與淸正, 爭功有隙. 今此和事不成, 亦淸正敎關白敗之. 今淸正來時, 船上當有某樣旗號. 朝鮮善水戰, 若邀之海中, 則淸正可擒, 而行長之怨除矣" 應瑞上其事, 朝廷多疑之. 海平府院君尹根壽, 素輕佻踴躍, 請如應瑞言. 在備邊司議不合, 則屢至承政院, 獨啓盛言 "機不可失", 上輒下其議. 是時元均爲忠淸道兵使, 與舜臣搆隙, 必欲陷之. 上疏言邊事, 語多侵舜臣. 以爲逗留, 均多內助, 上褒獎之, 以爲忠勇增秩爲資憲, 賜內廐馬, 復爲全羅兵使, 寵眷日盛. 舜臣平生不能事左右, 且爲余所薦, 李等以惡余之, 故必欲擠舜臣. 內外合勢, 論謗藉藉, 遂令舜臣率舟師, 往邀淸正於釜山前洋. 舜臣疑行長言不可信, 朝廷促之不已, 不得已遂引兵船前進. 而淸正已於數日前, 還泊西生浦, 我舟師至絶影島而回. 蓋倭人曾敗於舟師, 而舜臣久住閑山, 行長欲知多寡虛實, 故爲此語, 以誑之耳. 行長又使要時羅來言于應瑞曰 "吾念朝鮮舟艦甚盛, 今特孤弱耳" 事聞上震怒, 以爲舜臣臨機不進失誤軍機, 將加重罪, 而以元均代之. 余以爲統制使非舜臣不可, 今事急而易將, 使閑山不守, 則湖南不可保, 執爭之. 上愈怒謂備邊司 "依阿不直" 諸臣皆懼. 余以國事成敗至重, 猶力言之數日, 上命余出巡京畿*郡邑, 而引見宰臣, 諭舜臣之罪. 且曰 "我國亦有石星, 故舜臣恃此而然耳" 其時中朝石星, 兵部尙書主邊事權重, 故敎之, 聞者慄縮. 旣退而左相金應南等請逮捕舜臣鞠問, 元均代爲統制使. 體察使李元翼, 自南中上狀申救舜臣, 不得. 元均至陣, 悉變舜臣約束凡褊裨軍卒, 任使於前者皆易置, 軍士憤惋切齒. 識者皆知其必敗. 上命司成南以信, 往閑山廉察軍情, 南亦黨, 揚言曰 "舜臣應死無疑矣" 旣入湖南, 舜臣所率部曲及軍民, 遮馬訟舜臣寃, 且云 "我輩至今保存, 惟賴統制使. 今閑山不守, 則我輩將糜粉於賊手. 願以此意啓上" 以信悉匿不啓, 搆辭以啓曰 "淸正留海島七日, 可縛來, 而舜臣逗留不進" 云云. 上亦知其虛妄. 元均又追其軍士之訟舜臣者治之. 舜臣至獄, 上不忍誅, 遲回累日, 刑訊一次後議大臣. 惟判府事鄭琢以爲 "舜臣名將不當殺" 遂削奪官爵, 以白衣從軍.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하옥하여 고문했다가 사형에서 감해 충군하였다. 이때 적은 오랫동안 해변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였고, 먼저 서생포의 적장 가토 기요마사 등의 군을 철수시켜 신의를 보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이 일본에 건너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책봉을 받았지만 오히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재차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보내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게 했는데 아직 조선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 있었는데, 군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에 보내 은밀히 말했다. "고니시와 가토는 공을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 이 화친이 성립되지 않으면 (고니시는) 또 관백이 가토의 계책을 따르게 되어 (가토에게) 패하게 됩니다. 지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때, 배 위에는 당연히 가토를 표식하는 모양의 깃발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은 해전을 잘하니 만약 바다에서 맞아 친다면 (조선은) 가토를 잡고 고니시는 원한을 덜 것입니다"
김응서가 이 일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는 부질없이 경박하게 행동하며 김응서의 말을 쫓을 것을 청했다. 비변사에서 논의가 결론을 내지 못하자 (윤근수는) 여러차례 승정원에 나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했으나 임금께서 여러차례 그 의견을 기각하셨다.
이때 원균이 충청병사에 있으면서 이순신을 헐뜯으며 틈이 벌어저 기필코 이순신을 모함하고자 하였다. 원균이 변방의 일을 상소하면서 이순신을 공격했다. 원균이 밖에 오래 머물면서도 내조가 많아 임금께서 포장褒獎하면서 충용스럽다고 하시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작위를 더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셨다. 다시 전라병사가 되어서는 총애가 날로 더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평생 좌우에 아첨하지 않고 내가 천거했기 때문에 이산해 등은 나를 미워하여 이순신을 배척하고자 하였다.
안밖에서 합세하여 논의와 비방이 쌓여, 마침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가서 가토를 맞아 공격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말이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조정에서 끊임없이 재촉하여 부득이하게 수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하지만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돌아와 서생포에 정박했고, 아군은 절영도絶影島에서 돌아왔다. 대개 왜인들이 우리 수군에게 계속해서 패했고, 이순신이 한산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자 고니시는 아군의 군세와 허실을 알고자 이렇게 말해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에게 "나는 조선의 수군이 매우 성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만 외롭고 약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을 들은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이순신이 기회를 맞아 나가지 않아 아군의 기회를 그르쳐 실패했다면서 중죄를 더하고 원균에게 통제사의 직위를 대신하게 하라고 했다. 나는 통제사의 자리에 이순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앉힐 수 없고, 지금 사세가 급한데 장수를 바꾸어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 호남을 지킬수 없다고 의논을 모아 간쟁하였다. 임금께서 더욱 화를 내시면서 비변사에게 "권세에 의지해 아부하며 올곧지 못하다"고 하셨고, 이에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나는 나랏일의 성패가 중대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수일동안 힘써 아뢰었지만, 임금께서 나는 경기 지역의 고을들을 순시하도록 보내고 재신들을 인견하여 이순신의 죄를 유시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에도 역시 석성石星이 있다. 그러니 이순신이 믿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명나라 조정에서 석성이 병부상서로 국방의 일을 주관하여 권세가 막강하였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듣는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임금께서 나가시자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등이 이순신을 체포하여 국문하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남쪽에 있으면서 임금께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구명하고자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균이 한산도의 진영에 이르러 이순신이 부장들과 군졸들에게 약속한 모든 법도를 바꾸고 전임자(이순신)가 일을 맡겼던 사람을 모두 바꾸니 군사들이 분에 차 원망하며 치를 떨었다. 이에 식자識者들은 모두 수군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임금께서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에게 군정을 살필 겸 한산도에 보냈는데 남이신 역시 (이순신을 모함하는) 당이어서 태연하게 "이순신은 응당 죽여야 하는데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남이신이) 호남에 들어가자 이순신이 거느린 고을 및 군민들이 말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며 말하였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통제사(이순신)에게 의지한 바입니다. 지금 한산도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들은 장차 적의 손에 도륙될 것입니다. 원컨데 이 뜻을 임금께 올려주십시오" 남이신은 이 모든 것을 감추고 보고하지 않고, 거짓으로 말을 지어 장계를 올려 "가토가 바다 가운데 섬에 7일동안 머물러서 잡아올 수 있었는데 이순신은 (한산도에) 머무를 뿐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운운 하였다. 임금께서도 그 말이 허망함을 아셨다. 원균은 또 이순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던 군사들을 쫓아 (죄로) 다스렸다. 이순신이 옥에 이르자, 임금께서 차마 죽이기 어려워 여러차례 며칠에 걸쳐 형신을 한차례 가한 후에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오직 판부사判府事 정탁鄭琢만이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여서는 안됩니다"고 했다. 이에 관작을 삭탈하고 백의종군하게 했다.
* 원래는 이 부분에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재해권을 상실해서 전라도의 여러 고을이 함락된 일, 이순신의 복직과 명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을 재건한 일이 쓰여 있다. 하지만 『난후잡록』 자체가 원래 초고의 특성이라는 것을 감안, 내용이 이어지도록 편집했다.

트랙백한 글에 있는 『징비록』과 비교해 보면 거의 새로 쓴 수준이다. 특히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올 것을 주도한 것이 노골적으로 적혀있던 것이 『징비록』을 쓰면서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 여론이 주도한 것으로 내용이 다듬어졌다. 이를 위해 이순신이 어쩔 수 없이 나갔던 것이 『징비록』에서는 아예 편집되었다. 대신 이순신이 아예 출전하지 않았고, 전 현감 박성朴惺이 상소로 이순신을 공격해 논의를 주도한 것처럼 내용이 변했다.
* 실제로 이순신은 1597년 2월 10일 무렵 63척의 전선을 이끌고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함께 출전하긴 했었다. 하지만 작전은 별 소득없이 끝났고, 이순신은 한산도로 복귀한 후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또한 선조가 원균에 대해 편애했던 내용도 『징비록』에서는 모두 없어졌다. 장수의 자질이 안되고 타인을 비방하는 인물을 선조가 총애했다는 내용을 섣불리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사실이었고 재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선조와 관련된 내용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어조도 많이 완화되었다. 특히 윤두수와 관련해서는 비판적인 형용사가 『징비록』에서는 모두 지워졌다. 남이신에 대한 기록도 말이 간결해 지면서 감정이 많이 절제된 모습이다.
사실 이순신의 파직과 체포는 상당히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일본의 반간계, 야전사령관의 재량권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조정, 무능하고 무책임하지만 욕심은 많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원균, 속이 좁아 질투심이 많은 동시에 비열했던 임금 선조, 지나치게 "정치적"이어서 군사적 안목은 떨어졌던 윤근수 등......

유성룡은 주변을 의식해 『징비록』을 쓰면서는 감정을 절제해 야전사령관의 재량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간계에 넘어간 조선이 이순신을 끌어내려 칠천량의 참패를 가져온 것처럼 재구성했다. 하지만 유성룡 자신도 사건 당사자이고,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느꼈던 울분의 감정이 『난후잡록』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나중에 이원익도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대신 앉혀 칠천량의 참패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 없다"(『승정원일기』 인조 9년(1631년) 4월 5일)고 했는데, 유성룡은 오죽했을까.

막짤은 기분전환을 위해 막둥이 여신으로 마무리 ㄳ

핑백

  • 硏省齋居士의 雜學庫 : 유성룡의 칠천량 해전 재구성과 관련하여 2015-12-19 01:23:39 #

    ... 신의 해임과 관련해 유성룡이 『징비록』 초고에 썼던 글[링크], 칠천량 해전에 대한 『징비록』의 기록[링크], 그리고 이순신의 해임과 관련해 가장 처음 작성되었던 『난후잡록』에 기록[링크]까지 말이다. 이를 쓰면서 "『난후잡록』→초본 『징비록』→간행본 『징비록』"으로 기록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유성룡이 선조를 의식해 처음에 쓴 기록을 상당히 다듬었다는 것을 확인 ... more

덧글

  • 을파소 2015/09/03 00:43 #

    그 울분을 원균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더해주고 있죠. 파면 팔수록 욕만 나와도 조상이라고요.
  • 연성재거사 2015/09/03 12:15 #

    어디서 군인 같지도 않은 인물을 들고 와서 한다는게..........ㅡㅡ;;;
  • 아빠늑대 2015/09/03 01:43 #

    원씨 집안에 인물이 그 사람 뿐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괜찮은 인물은 빼놓고 왜 원균가지고 그러는건지.
  • 연성재거사 2015/09/03 12:12 #

    일단 평택시도 어떻게 좀.............ㅡ.,ㅡ
  • 엘레시엘 2015/09/03 03:03 #

    유성룡이 울화통 터진 상태에서 뒷목 잡고 써내려간 티가 팍팍 나는군요.
  • 연성재거사 2015/09/03 12:15 #

    이미 당대 『선조실록』의 사관도 사평에 있는대로 썼죠. "시사를 목도하건데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라고........
  • 로자노프 2015/09/03 09:46 #

    으아아... 발암입니다. 발암...
  • 연성재거사 2015/09/03 12:12 #

    국가 원수라는 왕이 도움이 안 되는 걸 보고 있으면 참.........-_-;
  • rezen 2015/09/03 13:35 #

    왕이 대놓고 처리하려 했고 밑에 사람들은 끌려가거나 부화뇌동하고... 저기다가 부산왜영 화공 가져다 이순신이 자초했다고 하는 사람도 재밌는 사람 많더군요.
  • 연성재거사 2015/09/03 17:43 #

    저걸 회고하던 유성룡은 이만저만 울화통이 터진게 아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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