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변용에 관한 간결한 논고-『유성룡인가·정철인가』 by 연성재거사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실의 복원이다. 이 과정은 당연히 기록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간혹 제일 믿을만한 사료는 실전失傳되고 남은 기록이 제각기 다른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속된 말로 "사람 미친다".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가 기축옥사(1589) 때 벌어진 이발李潑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물고(고문 도중 사망)를 당한 일이다. 아무리 조선의 사법심의가 고문을 합법화 한다 해도 여든이 넘은 노인과 10여세 정도 밖에 안된 아이가 고문끝에 참혹하게 죽은 사건은 여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추국청의 책임자인 위관으로써 누가 책임이 있는지-유성룡인지, 정철인지 격론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었다.
문제는 해당 사건의 1차적 기록인 『추안급 국안』이 3년뒤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버렸고, 그 와중에 『실록』에 기록될 사초도 불타면서 당쟁에 따라 "기억의 변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기억의 변용이 이루어지고 제각각 다른 소리를 하면서 나중에 황현黃玹조차 유성룡과 정철 중 어느쪽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취지의 시를 지었다.

2009년 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한겨례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 사건이 유성룡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오항녕 교수는 이에 대해 논박하며 논쟁이 진행되는 듯 했지만 이덕일 소장이 순환논증에 자신이 제시한 자료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면서 밀리는 듯 하자 한겨례가 판을 슬그머니 거두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_-;
애당초 이덕일 소장의 얘기는 음모론적 성향이 강했던 데다 『실록』도 제대로 교차검증을 하지 않아 간지에 낚여 연도를 60년이나 틀린 수준이니 묵살하자.(...) 하지만 오항녕 교수의 얘기도 빈약한 측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게 신경쓰였는지 이 사안과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탐구, 이번에 책으로 나온게 『유성룡인가·정철인가-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오항녕. 너머북스. 2015)이다.


기축옥사 와중에 노약자와 어린아이가 장하의 귀신이 된 책임소재의 진실을 가리려는 특정 주제로 쓴 만큼 책 자체의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 해봐야 300 페이지도 안된다) 특정 사건만 다루어도 얼마든지 긴 분량의 글이 나오지만, 애당초 책의 의도 자체가 1) 기억의 변용을 탐구하고 이를 역으로 따라가서 진실을 알아본다 2) 기축옥사의 탐구 과정에서 간과되어 온 추국청과 추국제도의 틈에서 문제의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 등을 다루었다. 2)의 경우는 『추안급 국안』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내공이 반영된 결과로 생각된다.

책을 읽다 보면 식견이 돋보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글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분들이 몇 있는데, 오항녕 교수님도 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조선의 힘』(오항녕. 역사비평사. 2010) 이래 제도적 측면에서 조선사를 설명하는데 힘쓰고 계시는데, 이분의 설명을 듣다 보면 기존의 프레임을 벗어나 역사를 다시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분의 특성을 믿고 책을 집어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책에서 언급된 당쟁론을 예시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흔히 당쟁 때문에 조선이 쇠약해지고 멸망해졌다는 인식은 식민사학에 의해 강조되었다고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의 당쟁은 다른 나라의 정쟁과 같은 차원이었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분은 당쟁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역사관-"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인가"(역사를 움직이는 기준을 무엇으로 둘 것인가)의 문제로 들어가 프레임 자체를 박살내 버린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듯하지만 매우 불완전한 논리이다. 당쟁론이 식민사관의 산물이라는 인식 자체가 안이한 것이다. 식민사관이 식민지 통치를 위해 왜곡된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서 당쟁론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당쟁론은 있었다. 이미 확인하였듯이 식민주의자들만 당쟁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연구자들도 당쟁론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보편적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사유 또는 접근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이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객관적 조건 그리고 안타까운 우연은 당쟁론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당쟁론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 시각이다. 타율성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당쟁론이 인간의 이지나 욕망을 절대화한다면, 타율성론은 객관적 조건만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위 책. p.258~259)

막짤은 새로 만들어낸 러블리즈 케이의 짤로 마무리 ㄳ

덧글

  • 홍차도둑 2015/05/16 07:31 #

    영국의 리처드2세인가 3새인가...의 "탑 안의 아이들" 건이 생각나는군요. 이런 논쟁은 계속되서 파생연구가 되어야 나와도 뭐가 나온다는 생각입니다만.

    참 이놈의 기억의 왜곡이란...
  • 연성재거사 2015/05/16 16:14 #

    그러니 루소가 역사에 대해 "가장 그럴싸한 거짓말"이라고 했던 것이죠. (사실 옳은 말은 아닙니다만......)
  • 위장효과 2015/05/16 08:26 #

    1. 기축옥사 관련해서는 정철도 토사구팽당한 셈.

    2. 당장 몇 년 전 사건만 해도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왜곡되는데 500년전 사건에서 그런 일이 안 벌어지리라곤...게다가 말씀대로 그 직후 벌어진 게 뭔 일이었던가를 생각하면 정말 추적하는 길이 깜깜하죠.

    3. 역시 학문하는 자세란 뭔지 보여주는군요. 아님 말고에 자신의 주장만 줄곧 미는 모 씨와는 다르게 학자답게 자신이 벌인 일-비록 다른 누가 먼저 벌여놓은 판이지만-을 마무리지어버리는 게 딱 비교가 됩니다.

    4. 그러니까 여기도 반역과 쿠데타가????????
  • 연성재거사 2015/05/16 16:17 #

    1. 저걸로 동인계열이 피만 본 것도 아니고, 기록을 보면 기축옥사 자체가 정철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2. 이래저래 전쟁은 기록 보존과 상극입니다. ㅡ.ㅡ

    3. ㅇㄷㅇ 말고 이런 분이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4. 여긴 이중 제국 아니고, 제 취향은 청순/귀요미로 고정되어 있.......(야!)
  • 누군가의친구 2015/05/16 15:03 #

    그러지 않아도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 목록에 올렸습니다. 저거 말고 나머지 올린건 죄다 짤렸더군요.(...)
  • 연성재거사 2015/05/16 16:14 #

    저희 도서관도 책이 있다 싶으면 그냥 추가 주문을 안 받더군요. 개정판이 나왔는데 구판이 학교에 있는 경우 답이 안나오니.....-_-;
  • 행인1 2015/05/16 22:56 #

    기억과 역사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소재인데 좋은책이 나온것 같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5/05/16 23:13 #

    짧지만 심도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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