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악법' 부민고소금지법에 관한 짧은 글 by 연성재거사

한국사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세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그중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이 '부민고소금지법'이다. 이 법은 세종 때 관료들 중에서도 '꼰대'로 이름이 높았던 허조許租(1369~1439)*의 건의로 입법화되었는데, 고을의 아전이나 백성들이 해당고을의 수령을 고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 당대 예학禮學의 전문가였는데, 별명이 '주공周公(주나라의 재상. 『주례周禮』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과 '수응瘦鷹(여윈 매)노인'이었던 인물이다. 『주례』의 정신과 법도에 심취해 말끝마다 『주례』를 찾아서 얻은 별명이 '주공'이었고, 원칙·복색·예의 같은 것을 심하게 따져서 젊은 관료들이 제일 싫어했던 재상이었다. 성격과 어울리게 젊었을 때부터 바짝 여위고 등이 굽은 용모를 가졌고 그래서 얻은 별명이 '수응노인'이다. 매가 마르면 날 생각은 않고 새 잡을 생각만 한다는 소리이다.-_-;
"원칙주의자인 예학 전문가"답게 예조판서를 오래 맡았고 만년에는 좌의정도 역임했지만 '꼰대성격' 때문에 재상진급이 늦었다.(...)

禮曹判書許稠等啓 "竊謂, 天下國家人倫所在, 莫不各有君臣上下之分, 不可少有陵犯之心也. 近來以下伺上, 得一小釁, 則羅織告訴, 以逞陵上之心者, 比比有之. 此等之俗, 漸不可長也. 古人有言曰: '一星之火, 至於燎原.' 若此不禁, 其流之弊, 至於君不得畜臣、父不得畜子, 故謹以防禁一二淺計, 條列于後......(中略)......朱文公言於孝宗朝曰 '願陛下深詔司政、典獄之官. 凡有獄訟, 必先論其尊卑上下、長幼親疎之分, 然後聽其曲直之辭. 凡以下犯上、以卑陵尊者, 雖直不右, 其不直罪加凡人之坐.' 前朝之俗, 緣此義, 民有陵犯守令者, 必斥逐之, 至瀦其宅而後已. 願自今如有府史·胥徒告其官吏·品官, 吏民告其守令與監司者, 雖實, 若不關係宗社安危及非法殺人, 則在上者置而勿論, 如或不實, 則在下者加凡人之坐論罪." 從之.
예조 판서 허조 등이 계하기를
"가만히 생각하오면, 천하나 국가는 인륜이 있는 곳이라, 임금과 신하의 상하 구분이 각각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능멸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윗사람의 일을 엿보다가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럴듯하게 만들어 하소연하며,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함부로 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풍조는 단연히 자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별[星]만한 불이라도 온 들을 태운다.'고 하였으니, 만약 이대로 두어서 금하지 아니한다면, 이 풍조의 폐단은 임금이라도 신하를 둘 수 없게 되고, 아비라도 자식을 거느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그러므로 이를 방지하여 금할 수 있는 한두 가지의 천근淺近한 방안을 뒤에 차례대로 적어 올리나이다.......(중략)......주문공朱文公(주희)이 효종孝宗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정사를 맡은 벼슬아치거나 옥을 맡은 벼슬아치에게 깊이 일깨워 주소서. 대저 옥사나 송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족속인가 비속인가, 윗사람인가 아랫사람인가, 어른인가 어린이인가, 가까운 사이인가 먼 사이인가를 따진 뒤에, 그 곡직에 관한 말을 듣습니다. 만일 아랫사람으로서 웃어른에게 대항하거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능멸히 여기는 것이라면 비록 옳다 하더라도 그 옳은 것을 인정하지 말 것이며, 더욱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죄를 보통 사람의 경우보았다 더 중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조前朝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히 여기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官의 관리와 품관品官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을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9월 13일)

이 글을 보면 허조 특유의 '꼰대' 성격답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이 '악법'을 건의하고 세종이 이 말도 안되는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킨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민고소금지법을 좀 더 살펴보면 한 인물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 기억되고 역사에서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잊혀지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일단, 이 법은 세종이 처음 만든 것도 아니다. 세종은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 경자년(1410년)에 태종이 건의를 받아들여 법을 만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세종실록』 세종 13년 6월 20일) 『태종실록』의 해당 부분을 보자.

告訐之風盛行, 欲害人而掛無名狀者有之, 欲逞忿而擊申聞鼓者亦有之, 至於讒訴守令者, 亦多蜂起. 蓋守令受命九重, 出宰百里. 十室之邑, 尙有君臣之禮, 雖有愆違, 爲其民者諱而隱之可也, 諷而警之可也. 況居是邦, 不非其大夫乎? 彼土豪鄕愿·猾吏奸民, 或被笞杖, 或迫賦役, 反爲私讎, 日夜孜孜, 陰中傷之. 國家以其讒言, 盡法於守令, 不論奸民訴守令之罪, 爲下賊上之風興焉. 臣等謂興一州, 則遍於一道, 興一道, 則遍於一國, 如此則入孝出悌之美士, 親上死長之善俗, 何自而出乎? 且守令無私至公者, 則見讒於豪猾, 其柔軟劫弱者則畏讒而斂手, 政令之不行, 賦役之不均, 良以此也. 臣等願, 疾人之奸惡而慷慨直告者, 惡守令貪暴而無私陳告者, 皆不坐, 其事關宗社外, 以怨而訴平民者, 挾私而讒守令者, 竝坐'挾私害人, 爲下賊上之罪', 移澆薄之風, 成忠厚之俗.
고자질[告訏]하는 풍속이 성행하여 사람을 해치기 위해 무명장無名狀을 등록하는 자가 있고, 분풀이[逞忿]를 하고자 하여 신문고를 치는 자도 있으며, 수령을 참소讒訴하는 자가 또한 많아서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대개 수령이란 구중九重에서 명령을 받고 백리나 되는 곳에 나가서 정사政事를 맡은 자[宰]입니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군신君臣의 예禮가 있으니, 비록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백성된 자가 휘諱하여 숨기는 것이 가하고, 풍자諷刺하여 일깨우는 것이 가합니다.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저 토호土豪·향원鄕愿과 교활한 아전·간사한 백성들이 혹 태장笞杖을 맞거나, 혹 부역賦役에 시달리면, 도리어 사사롭게 원수 삼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속으로 중상中傷합니다. 국가에서는 그 참소한 말을 가지고 수령에게는 법을 다하고,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고소한 죄는 논하지 않으니, 이리하여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해치는 풍속이 일어납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에서 일어나면 한 도道에 퍼지고, 한 도에서 일어나면 한 나라에 퍼지니, 이렇게 되면, 들어오면 효도孝道하고 나가면 공손히 하는 아름다운 선비와 윗사람을 친히 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착한 풍속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또 수령守令으로 사私가 없고 지극히 공정한 자는 호활豪猾한 자에게 참소를 당하고, 유연柔軟하고 겁약劫弱한 자는 참소를 두려워하여 손을 거두고 있으니,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고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원컨대, 사람의 간악奸惡한 것을 미워하여 강개慷慨하게 바른 대로 고하는 자와 수령의 탐하고 사나운 것을 미워하여 사私가 없어 진고陳告하는 자는 모두 좌죄坐罪하지 말고,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 이외에 원망을 가지고 평민平民을 고소하는 자와 사감私感을 끼고 수령을 참소하는 자는 아울러 '사私를 껴서 남을 해치고, 아랫사람이 되어 윗사람을 해치는 죄'로 좌죄하여, 경박輕薄한 풍습을 옮겨 충후忠厚한 풍속을 이루소서.
(『태종실록』 태종 10년(1410) 4월 8일)

다시 말해 태종때 만들어지고, 그 뒤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입법된 법이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소리이다. 이 법은 과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치는 풍속'을 막기 위한, 전근대의 유교적 발상으로 만든 악법이었을까?
먼저 이 법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전래동화의 세계를 지워야 한다. 지방관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말하면 우리는 흔히 전래동화에 나오는 욕심많은 고을 사또가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을 수탈하는 모습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모습은 수령의 권한이 강해지고 소위 '돈과 빽'으로 관직이 정해지던 세도정치기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법안의 진짜 목적은 '토호土豪, 향원鄕愿과 아전'들, 다시말해 지방세력이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을 고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조선과 고려의 가장 큰 차이는 지방제도에 있다. 고려는 다원적이고 분권적인 지방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수령들은 전반적으로 권위가 강하지 못했고 향리와 지주들이 통치권을 행사했다. 고려가 안정적이었을 때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체제였지만, 무신정변과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불안전한 체제는 파국을 일으켰다. 국가권력의 대리인인 지방관이 힘이 없다보니 국가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지방의 토지에 눈독을 들인 권문세족의 침탈이 그만큼 용이해졌다. 엉망이 된 행정으로 인해 조세는 형평성을 잃어버렸고, 주민들이 유민流民화되면서 국가재정과 국방력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왜구를 상대하던 고려의 힘은 소진되었다. 심지어 고려 말에는 뜻있는 수령이 권문세가의 농장으로 쳐들어갔다가 노비에게 구타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조선이 초기에 정비한 제도들 중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이런 '지방통치와 수령제의 개혁'이었다. 조선은 지방 곳곳에까지 국가의 행정력이 행사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이를 위해 지방제도를 일원화하고 수령의 권위를 강화했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강화하고 수령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었다. 즉,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의 말 안듣고 시비걸어서 중앙정부 정책에 훼방을 놓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 부민고소금지법이 가진 진짜 의미였다. 이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수령에게 지방행정을 일임하겠다는 국가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법의 특성상 부작용은 당장 나타났다.ㄱ- 그리고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백성들은 지방수령을 계속해서 고소했다. 결국 세종은 1429년 법을 수정해 고소가 끊이지 않는 수령은 장 100대에 파직하게 하였다. 동시에 아전과 향리들에게도 처벌을 가했는데, 이는 '지방의 실권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 수령의 비행에 공동책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수령들을 실제로 처벌하기도 했다.

判喬桐縣事李宗揆, 捶縣民年六十者致死, 命罷宗揆職.
판교동현사判喬桐縣事 이종규李宗揆가 나이 60이 된 자를 (장杖으로) 쳐서 죽였으므로, 명하여 종규의 직위를 파면하였다.
(『세종실록』 세종11년(1429) 11월 13일)
* 이종규는 복직되었으나 관노官奴를 때려죽인 죄로 장 9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6월 13일)

물론 이런 걸 가지고 부민고소금지법의 폐단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고(...) 때문에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조 때 잠시 폐지되기도 했었다.

敎旨 "......(中略)......自今分遣御史于八道, 巡行糾理. 然考察條目煩碎, 則近於吹毛, 必有騷擾之弊, 有乖大體。 且有監司旣行統察, 不必事事擧劾, 如貪墨虐民二事, 予所痛心者, 其令專委糾覈。 且部民自己冤抑, 亦依舊制許令告訴, 期於貪墨自戢, 吾民安業......(後略)......
임금이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중략)......이제부터 어사御史를 8도에 나누어 보내어 순행하면서 규찰해 다스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찰하는 조목條目이 번잡하게 어지럽혀지면, 결점을 억지로 찾는 데 가까와서, 반드시 소요를 일으킬 폐단이 있어, 국가의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으며, 또 감사監司가 있어 이미 통찰統察을 행하고 있으므로, 일일이 들어서 탄핵彈劾할 필요는 없으나, 이익을 탐하거나 백성을 침해하는 것 같은 두 가지 일만은, 내 몹시 미워하는 것이어서 오로지 위임해서 규찰糾察하여 구명할 것이다. 또 부민部民의 자기의 원통冤痛하고 억울한 일은 또한 구제舊制에 의하여 고소告訴를 허용하여 기어코 탐오貪汚의 행위가 스스로 그쳐서 우리 백성들이 편히 그 생업에 종사토록 할 것이다......(후략)......"
(『세조실록』 세조1년(1455) 11월 8일)

세조때 부민고소금지법이 폐지된 이유는 지은 죄가 많아 양심에 찔린 세조가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조의 집권을 도운 공신집단들이 특권층을 형성하고, 이들과 결탁한 인사들이 수령으로 파견되면서 수령의 비리행위를 고발하지 못하게 만든 부민고소금지법의 부작용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세력의 기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지방세력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말을 안듣고 허위사실을 고발하여 시비를 거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중앙에서 지방행정을 통제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때문에 이 법을 폐지했던 세조도 부민고소금지법을 다시 부활시켰다.-_-;

有人登白嶽, 摩旗擊錚, 上遣人尋之, 其人棄旗而逃, 收取視之, 乃司宰監官吏加率丘史等不法事也. 上命江陽君融, 下承政院焚之, 卽令兵曹, 執其人鞫之. 先是, 令部民得訴官吏不法事, 於是義盈庫·掌苑署官吏等, 皆被告, 劾之果驗, 上罪官吏, 而賞告者. 由是告訴蜂起, 諸司奴僕, 一有不愜, 則輒造飾虛僞, 以傾官吏, 劾之往往多不實. 上頗厭之, 至是命焚其書, 不復推鞫.
어떤 사람이 백악白嶽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징을 치는 자가 있으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찾게 하였더니, 그 사람이 깃발을 버리고 도망가 붙잡고 보니, 바로 사재감司宰監 관리의 가솔加率한 구사丘史 등의 불법한 일이었다. 임금이 강양군江陽君 이융李融에게 명하여 승정원에 내려 불사르게 하고, 즉시 병조兵曹로 하여금 그 사람을 잡아다가 국문하게 하였다. 이 앞서 부민部民으로 하여금 관리의 불법한 일을 고소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에 의영고義盈庫·장원서掌苑署 관리들이 모두 고소를 당하여 핵실하였더니, 과연 증험이 있어 임금이 관리를 죄주고 고발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소하는 것이 벌떼처럼 일어나 여러 관사의 노복奴僕이 한 가지라도 뜻에 맞지 않음이 있으면, 문득 허위虛僞를 꾸며 만들어서 관리를 모함하여, 핵실하면 왕왕히 사실이 아닌 것이 많았다. 임금이 자못 이를 미워하여 이에 이르러 그 글을 불사르도록 명하고, 다시 추국推鞫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14년(1468) 5월 6일)

부민고소금지법은 단순한 악법이 아니라, 지방행정을 일원화하고 국가행정력을 강화하여 지방 구석구석까지 국가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수령에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한 법률이었다. 그리고 이 법안은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조선 내내 유지되게 된다.
* 그리고 부민고소 금지법이 있었다 해도 조선시대 수령들은 쉽게 해임되었다. 상소 한 장, 사소한 고발에도 수령직은 날아갔다. 심지어 말 한마디를 무심코 잘못하거나 제사 때 접시 하나를 깨트린 죄로 파직된 수령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제도와 법에는 단점과 폐단이 있다. 그러나 주어진 배경에 따라 그 폐단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폐단이 적으면 장점을 살리는 체제를 구상할 수 있으나 장점으로 얻는 이득보다 폐단의 정도가 심각하면 장점을 포기해야 한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법규의 이론과 근원을 상고하고, 그것이 미칠 영향력을 감안한 전체를 조망한 후에 법규를 제정해야 한다. 조선은 지방제도를 일원화하고 중앙정부의 행정능력을 지방에 행사하려고 했지만, 무신정변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가 무력화 된 상태가 200여년 동안 지속된 상황이어서 지방행정 확보는 지지부진했고, 이를 강행하기 위해 만든 법이 부민고소금지법이었다. 이런 노력 덕택에 조선은 안정적으로 지방을 통제했고, 구한말이 되기 전까지 사회와 국가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흔히 세종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고 하는데, 세종은 이를 위해 각종 제도들을 모두 세세하게 검토하고 제정했다. 부민고소금지법도 폐단을 각오하고 수령의 권위를 강화하고 지방행정을 강화하기 위해 세운 법안이었다. 강화된 권위를 바탕으로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중앙정부에서 부여받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조선은 각 지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종합하여 데이터베이스화했다.(『세종실록』에 부록으로 붙은 《지리지》가 그 결과물이다) 세종의 업적으로 남은 각종 사업들은 이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세수를 확충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역사에서 정책과 변화를 관찰하면서 '비리와 갈등, 부정이 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세상'만을 추구하거나 기대한다면 역사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 간혹 그런 세상이 있었다거나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원시사회는 경쟁도 없고, 권력도 없는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였다'는 말만큼이나 거짓이거나 착각이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인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시대는 야만과 폭력과 굶주림의 시대였다.
새로운 제도는 새로운 문제와 도전과제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어떤 부분은 개선되고 어떤 부분은 더 악화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진보와 발전을 위한 제도를 판정해야 할까? 세계적·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닥칠, 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변화를 판정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체제인지를 따져 그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시대의 개혁가들-역사의 변화를 선택한 사람들』(임용한. 시공사. 2012) p.173)

* 지방자치제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부민고소금지법까지 시행하면서 지방을 통제하려고 한 조선의 지방통치 제도가 옳은 방법이었냐고 물을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것이 옳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제가 2백년 동안 이루어진 결과 조선은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때문에 1592년 벌어진 전쟁에서 수도가 함락당한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후방의 행정조직이 그대로 살아있을 수 있었고, 이는 관군이 재정비되고 의병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막짤은 늘 그랬듯이 에이핑크의 막둥이 여신으로 마무리 ㄳ

덧글

  • 까마귀옹 2015/02/04 23:38 #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도 부민고소금지법은 일종의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조선 초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토착 세력을 통제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느냐였지요.
    그리고 부민고소금지법이 필요 이상으로 비판받는 점에는 이 법을 제정한 임금이 세종이다 보니, '가장 완벽하신 세종대왕께서 이 따위 법을 만드셨을리 없다능!'같은(...) 반발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5/02/05 16:56 #

    근데 저렇게까지 할 만 한게, 지방세력의 세력이 워낙 강해 양민에게 행패를 부리고 사적 노비로 강탈하는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면 국가 입장에서는 세금내고 군역지는 애들이 줄어든다는 것이니 -_-;)
    제가 볼 때는 수령의 이미지에 대해 자꾸 전래동화에 나오는 탐관오리 이미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런 것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위인이라고 흠집무결한 존재는 아니었다능!' 식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트렌드를 탄 것도 있는 것 같고 말입니다. ㅡㅅㅡ
  • 로자노프 2015/02/04 23:54 #

    수령고소금지법은 그러고 보니 예외 조항도 꽤나 많이 둬서 예를 들면 동래부 백성이 부산포 지방관을 고소하는 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그랬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요.
  • 연성재거사 2015/02/05 23:45 #

    나중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직접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다른 고을의 수령을 고발하거나 하는 경우 아니면 저런 고발을 안받는 방법으로 법이 자리잡게 됩니다.
  • 별바라기 2015/02/05 00:06 #

    모든 법에는 양면성이라는게 적용되니까요.

    적어도 중앙에 의한 통제라는 기준에서라면 부민 고소 금지법은 충분히 유효했다고 생각합니다.

    뭐 저 시대때는 지방통제가 아예 안되는 나라들도 있었으니...(....)

    P.S)늘씬하고 잘 뻗은 막둥이...!

    제가 추종하는 애들에게는 바랄수 없는것이긴 합니다만...(............)
  • 연성재거사 2015/02/05 16:53 #

    저때는 물론이고 조선 말에도 조선은 세계 기준으로 봤을 때 최고수준의 지방행정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저런 법이라도 있어서 그런 게 가능했던 거죠. -_-;

    p.s) 우월하신 여신님입니다. 거대 막둥이라고도 하는.....(그만)

    그래도 주니엘이나 아이유 전부 귀엽고 노래 잘 하니 그만하면 매력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방명록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취존중입니다. ㄳ
  • 대한제국 시위대 2015/02/05 00:25 #

    중앙집권 해먹기 참 힘드네요.....................ㅡㅅㅡ

    결론은 닥치고 오하영이군요. 오하영이면 향리들이 하영낭자 만세를 외치면서....(뭐?)
  • 별바라기 2015/02/05 00:42 #

    아니오 연성재거사님은 살리카법 철폐 이후, 막냉이의 여왕 등극을 추대하실 분입니다! (고만해 미친놈아!)
  • 대한제국 시위대 2015/02/05 00:44 #

  • 위장효과 2015/02/05 06:33 #

    살리카법을 철폐하는 목적은 오로지 리지은의 여왕 등극...
  • 연성재거사 2015/02/05 16:50 #

    대한민국 시위대/ 무신정변 이후 300년 넘게 지방에서 자기들끼리 놀던 애들이 하루아침에 중앙정부 말을 그렇게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나온게 '닥치고 중앙에서 보낸 수령 말 들어'라는 식으로 나온 부민고소금지법이고요. ㅡㅅㅡ

    하지만 오프로디테 여제, 아니 여신이 뜬다면.....(그만해 이 미친 놈아!)

    별바라기/ 별바라기님은 아이유를 대한제국 황제로 세우실거잖슴? 'ㅅ' 저는 제 취향대로 오하영을......(고만해!)

    위장효과/ 그건 별바라기님 얘기이고요.......-_-;
  • 위장효과 2015/02/05 06:34 #

    세종 시대 만들어진 제도가 사실상 조선왕조 끝까지 간 셈이니까요. 세제의 근본적 개혁이었던 대동법 정도나 예외로 쳐 줄 수 있을까.
  • 연성재거사 2015/02/05 16:46 #

    괜히 세종이 조선 5백년을 만들었다는 소리가 나온게 아니죠.
  • 위장효과 2015/02/05 17:35 #

    리지은 여왕 등극은 저도 같이 밀고 있지 말입니다.(그만해 이 미친 놈아!!!!)

    인상도 인상이지만 일단 체형도 역삼각형에 키도 크고 하니 스물네짤! 리다조차 언니라고 생각햇을 수 밖에요. (저런 체형이 관리 조금만 더 하면 진짜 섹시파워 100만볼트!!로 진화할 수 잇지 말입니다)

    근데 뒤의 배경인 스쿨룩스 CF...에서 주력은 오히려 언니들-손나노라든가 손나노라든가...-이란 게...
  • 연성재거사 2015/02/05 18:10 #

    사실 교복 광고로 쓰기에는 롱리다와 93라인이 더 적절.......(합기도와 태권도에 나가 떨어진다)
  • 행인1 2015/02/06 23:31 #

    세조는 본인이 폐지했다가 부활시켰다가 하니 무슨 생각이었던건지...
  • 연성재거사 2015/02/10 10:47 #

    공신집단이 형성한 특권층과 결탁한 인물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면서 부작용이 심해져서 이를 없앨 겸, 나름 제왕을 꿈꾸던 세조로서는 '공신들 길들이기' 차원에서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방세력이 말을 안 듣는게 너무 심해져서 다시 부민고소금지법을 부활시킨 것이긴 합니다만.......ㅡ.ㅡ
    그런 점에서 세조와 세종의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세조 역시 세종처럼 국가의 제도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구조적·거시적 시각이 세종에 비해선 부족해서 세종 때 복잡한 토의 내용을 'Simple is the best'식으로 지우고 결론만 추렸는데, 결국 성종 때 다시 토의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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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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