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복귀와 관련된 뒷얘기 한국사韓國史

1597년 7월 22일, 원균元均이 대참패를 당했다는 보고를 접한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했다. 그 뒤 벌어진 극적인 장면은 한국 전쟁사를 통틀어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이 되었다.

형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기분 좋았지?
(* 김기창 화백이 1975년 그린 명량해전 기록화)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 다시 임명되는 과정도 만만치 않게 극적이다. 『징비록』은 이순신이 다시 기용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復起李舜臣, 爲三道水軍統制使. 閑山敗報至, 朝野震駭. 上引見備邊諸臣問之, 群臣惶惑, 不知所對. 慶林君金命元, 兵曹判書李恒福, 從容啓曰 "此元均之罪, 惟當起李舜臣, 爲統制使耳." 從之.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하였다. 한산도의 패전 보고가 도착하자, 조야朝野가 두려워하고 놀랐다. 임금께서는 비변사의 여러 신하를 만나 의견을 물어보셨으나 신하들은 두렵고 혼란스러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이 조용히 아뢰기를 "이는 원균元均의 죄입니다.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에 임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하고 아뢰자, 이에 따르셨다.
(『징비록』 권2)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징비록』을 문구만 고쳐서 베낀 수준이니 논외로 하고 『선조실록』을 보자.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조가 접견한 비변사 당상관들은 다음과 같다.

유성룡柳成龍(영의정)
윤두수尹斗壽(판중추부사)
김응남金應南(우의정)
정탁鄭琢(지중추부사)
김명원金命元(형조 판서)
이항복李恒福(병조 판서)
유영경柳永慶(병조 참판)
노직盧稷(상호군)
정광적鄭光績(좌승지)
박승업朴承業(주서注書)
이성李惺(가주서假注書)
임수정任守正(검열檢閱)
이필영李必榮(검열)

회의는 선조가 먼저 입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上以金軾書啓, 出示大臣曰
"舟帥(師)全軍覆沒, 今則無可奈何. 大臣當往告于都督, 按察衙門."
又曰 "未知忠淸, 全羅等道有餘船乎? 豈可諉以無可奈何而置之. 今可收拾餘船, 以爲防守之計耳."
임금께서 김식金軾의 서계를 대신들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주사舟師가 전군이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대신이 도독과 안찰按察의 아문에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은 배가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만 대고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로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 뿐이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남은 전선을 수습해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원균의 후임자를 누구로 세울 지 얘기해야 한다. 하지만 대신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선조는 화를 내며 대신들을 질책했다.

大臣何不答乎? 將欲置而不爲乎! 不答則倭賊可退, 而國事可做乎!
대신들은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국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멀쩡한 이순신 자르고 원균을 앉혀서 이런 상황을 제공해준 게 누구더라.......ㄱ- 유성룡이 입을 연다.

非敢不對, 悶迫之間, 未得思其策, 不及達矣.
감히 대답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근심하는 가운데 재촉하시는 나머지 계책을 생각지 못하여 미처 주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30(1597) 7월 22일)

어조가 공손해서 그렇지 대놓고 말하면 "정신 차리시고, 생각 중이니까 재촉해 대지 마십시오"라는 대꾸나 다름없다.-_-; 체면을 구긴 선조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말을 한다.

上曰 "全軍覆沒, 天也奈何. 元均雖死, 豈無他人. 但當收拾各道船隻, 速爲防備而已."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주사 전군이 대패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각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그럼 하늘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다는 건가.......-_-; 이 때 선조의 멘탈이 어디까지 나갔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선을 수습해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를 임명해야 하는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선조는 중간에 말을 돌려보지만 결국 통제사 재임명으로 논의가 돌아오고, 보다 못한 이항복이 입을 연다.

上曰 "固守閑山, 以爲虎豹之勢可也, 而必令督出, 以致此敗. 非人之所爲, 天實爲之. 言之無益, 豈可置之無可奈何, 而不爲之所乎. 當收拾餘船, 防守於兩湖之界."
恒福曰 "爲今之計, 莫如差出統制使及水使, 使之畫策防守耳."
선조: 한산을 고수하여 범과 표범이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했다.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어해야 한다.
이항복: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어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선조는 이항복의 건의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다시 화제를 칠천량 해전의 정황으로 돌린다.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기 싫으니 논점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유성룡이 논의를 다시 사후 대책으로 끌어들이고, 김명원이 이항복의 견해를 거들기 시작한다.

成龍曰 "若失閑山, 則南海, 是要衝之地, 今必爲賊所據."
上曰 "領相憂南海耶?"
成龍曰 "豈獨以南海爲憂哉?"
上曰 "此豈獨人謀之不臧? 天也奈何?"
命元曰 "若遣將則誰可爲者?"
恒福曰 "今日之事, 惟在是而已."
유성룡: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선조: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유성룡: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선조: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김명원: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이항복: 오늘날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체면이 구겨진 선조는 다시 원균을 편들며 논점을 돌린다.ㄱ- 후속 대책을 논의했지만, 결국 명확한 결론 없이 이 회의는 끝났다. 이순신의 재임용은 『징비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의 기록 뉘앙스처럼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결국 이순신이 다시 임명되긴 하는데, 그 전에 선조는 비변사를 질책해서 체면치레를 한다.

備忘記, 傳于政院曰
"今日筵中大臣, 喪氣不能出聲. 嗚呼! 平日銳於論議, 算無遺策, 至於莫不欲守都城, 譏予恇怯, 何今日氣餒如此? 若憂悶結於中心而已, 則賊將退耶. 古者陸秀夫, 當飄泊崖山, 尙欲有爲. 今日國事雖迫, 上有父母之國, 次有天將, 布列中外, 我國寧有終不振之理乎. 勝負, 兵家常事, 閑山之敗, 不足憂也. 漢高祖十戰九敗, 終有天下, 彭城之戰, 覆沒五十萬衆, 未聞漢廷大臣, 以此而氣沮也. 古之帝王將相, 或單騎而走, 或累日不食, 濱死者多矣, 然跲而復奮, 終能成功. 予雖不敏, 願將天將之後, 東西騁騖, 不但使士民獨死也. 當此之時, 大臣不當如是, 第於其間, 處置曲折, 則不可不周密. 此意, 言于備邊司."
備邊司回啓曰 "伏承下敎, 聖志奮發, 足以振起群臣衰縮之氣. 臣等不勝慙愧感激之至. 臣等雖至愚, 亦知今日之勢, 進有一死, 退無所歸, 策勵自奮, 死中求生之外, 無他善策. 但臣等參在機密重地, 計策失宜, 使國事至此, 此所以徊徨氣塞, 承問而不知所答也. 今承聖敎, 中外人心, 孰不增氣? 古之能濟大業者, 百戰百敗, 而志氣不挫.聖志旣如此, 賊患有不足慮也. 第恐臣等, 終是愚下, 無以奉承明敎, 以濟艱難耳."
上曰 "君臣死則同死. 卿等別無所失策之事, 況成敗在天. 未可輕爲沮喪, 更加規畫措置."
(임금께서)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이 사기를 잃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으니, 아, 슬프도다. 평일에는 사리를 논의하는 데에 날카롭고 국사를 계획하는 데에도 있는 계책을 다하여 심지어 모두가 도성을 지키자고 하고 나를 겁장이라고 기롱하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사기가 상실되었는가. 마음 속으로 근심만 한다고 왜적이 저절로 물러갈 것인가. 옛날에 육수부陸秀夫는 애산厓山에 표류해 있을 때도 오히려 국사를 도모하였다. 오늘날 국사가 비록 절박하다고 하나 위로는 부모와 같은 중국이 있고 또 중국 장수가 중외에 배치되어 있으니 어찌 우리 나라가 끝내 일어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니 한산에서 전패한 것은 근심할 필요가 없다. 한 고조漢高祖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패하였으나 끝내 천하를 차지하였으며, 팽성彭城 전투에서 50만 군이 항우項羽에게 전멸을 당했어도 한나라 조정 대신들이 이 때문에 사기가 꺾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또한 옛 제왕과 장상將相들 중에 혹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여러 날 먹지 못해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많았으나 대부분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비록 불민하기는 하나 중국 장수의 뒤를 따라 동서로 치빙馳騁하기를 원할 뿐이요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신들이 무기력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니 어쨌든 이런 때일수록 여러 가지 처사를 주밀하게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뜻을 비변사에 이르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삼가 하교下敎를 받드니 성상의 그 분발하신 뜻은 군신들의 위축된 사기를 다시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신들은 너무도 감격되고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어 도리어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극히 어리석으나 오늘의 상황은 나가면 한 번 죽는 것이요 물러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으니, 자신을 독려하고 분발함으로써 죽을 땅에서 삶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신들이 외람하게도 국가 기밀을 담당하는 중지에 있으면서 계책을 잘못하여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망설이며 사기가 저하되어 물음을 받고도 답할 바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의 교지를 받들고 보니 중외의 인심이 어느 누가 사기를 돋우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대업을 이룬 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더라도 지기志氣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왜적의 환난은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어리석은 탓으로 밝으신 상의 교지를 받들어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는 죽게 되면 같이 죽는 것이다. 경들은 별로 실책한 일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경솔하게 좌절하지 말고 더욱 계획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조치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7월 22일)

그 와중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게 아니라 되려 큰소릴 친 데서 자신의 권위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드러난다.-_-; 
그런데 이렇게 될 만한 사연이 『징비록』에 있었다. 편집되어 간행된 『징비록』이 아니라 초본草本 『징비록』에 사건의 정황과 뒷얘기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復起李舜臣, 爲三道水軍統制使. 初元均敗於洋中報至, 上咎備邊司, 促元均進兵引唐哥舒翰宋楊業事爲諭. 數日閑山敗報又至, 朝野震駭, 上引見備邊司問之, 天顔甚厲. 慶林君金命元, 兵曹判書李恒福, 從容對曰 "此元均之罪, 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 上默然旣退. 得旨統制使依諸臣議.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원균이 바다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도착했을 때, 임금께서는 원균이 병사를 끌고 진격하도록 재촉했다고 당唐의 가서한哥舒翰과 송宋의 양업楊業의 고사를 빗대어 비변사를 책망했다. 수일數日 후 한산도의 패전 보고가 또 도착하자, 조야朝野가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임금께서 비변사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의견을) 물었는데, 임금의 얼굴이 매우 분노에 차 있었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이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는 원균元均의 죄입니다.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에 임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임금께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나가셨다.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한다는) 명령(旨)을 얻었다.
(* 추가로 찾아보니 최석남崔碩男의 이순신 전기 『구국의 명장 이순신』(최석남. 교학사. 1992)에도 이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下권 p.495~496) 최석남은 天顔甚厲를 天敎甚庸으로 읽었지만, 초본의 초서체와 대조해 보면 『서애전서』의 판독 대로 天顔甚厲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초본 『징비록』 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 天顔甚厲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초본의 기록은 『선조실록』과 차이가 있다. 우선 선조의 태도에 대해 화가 난 상태였다고 되어 있고, 김명원과 이항복의 발언이 우회적인 언질이 아닌 직설적 어조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어전회의의 전체적 분위기와 결과가 그대로 전달된다. 그런데 왕이 이순신의 재등용에 대해서 끝끝내 답을 안 하고 자리를 파했으며, 신하들이 결의한 끝에 이순신 재임용 명령을 받아냈다고 전혀 다른 뒷얘기가 실려 있다. 분노한 상태에서 이순신이 다시 거론되자 선조는 아무 말도 않다가 나갔고, 보다 못한 신하들이 결론을 낸 뒤 왕의 명령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얼마나 왕의 태도가 답답했으면 신하들이 먼저 합의했냐는 생각이 드는데,-_-; 이 초고의 기록이 사실이었다면 『선조실록』에 나오는 뻔뻔한 비변사 질책이 갑자기 왜 나오는 지 자연스러워진다. 선조를 배려한 정치적 이벤트로 엎드려 절받기 놀이였던 것이다.

『징비록』이 간행되는 과정에서 편집되어서 그렇지, 초본에 쓰여진 내용을 보면 이기적이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에 과도하게 집착한 선조의 모습이 더욱 생생히 드러난다. 여기 올린 것 말고도 초본을 보면 선조를 의식해서 문장이 고쳐지고, 내용이 편집된 부분이 꽤 많이 나온다. 끝까지 선조에게 충성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유성룡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선조에 대한 실망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P.S) 『징비록』 드라마가 나오는 것에 대해 『교감·해설 징비록』을 내신 김시덕 교수님은 "『징비록』 자체가 워낙 잘 쓰여져서 이것만 잘 활용해도 훌륭한 대본이 나올 것이다"고 하셨다. 아마 초고본을 활용하면 그 폭이 더욱 넓어지지 않을련지. 하지만 작가하고 방송국 입맞에 맞게 간행본이 고쳐져서 엉뚱한 소설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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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을파소 2014/10/17 22:53 #

    징비록을 원작으로 사극 제작하는 건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선택만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아직 가시지 않습니다. 아, 아직 유성룡과 선조 뿐이지만 캐스팅도 좋긴 하더군요.
  • 연성재거사 2014/10/18 10:14 #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잘 만들어서 정통 사극의 부활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만......
  • 아텐보로 2014/10/18 01:03 #

    언제나 봐도 저부분의 선조는 책임회피와 물타기의 절정입니다.
  • 연성재거사 2014/10/18 10:15 #

    그나마도 화가 난 상태여서 제대로 못 한 것 같습니다. 선조의 논리 대로라면 하늘이 조선군을 패하게 하려고 작정했다는 건데, 그럼 조선은 하늘이 버린 나라란 겁니까.........-_-;
  • shaind 2014/10/18 01:34 #

    저 건에 관한 한 선조는 정말 찌질 그자체군요.
  • 연성재거사 2014/10/18 10:18 #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기 권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다 망쳐놓은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실제로 이이는 선조에 대해 불공정성과 아량부족, 지나친 승벽이 선조의 세가지 기질의 병이라고 지적했고, 신하들 중 의지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적은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게 전쟁 중에 최악의 형태로 드러나죠. -_-
  • 위장효과 2014/10/21 10:46 #

    조선왕조실록볼때마다 감상: 과연 키배의 민족...왕한테도 저렇게 디스놓는 거 보면...
  • 연성재거사 2014/10/21 12:03 #

    솔직히 이 때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디스를 당할 만 하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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