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준이 어디 가나 했다 by 연성재거사

『이순신의 두 얼굴』(김태훈. 창해. 2004)의 개정판이라는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김태훈. 일상과이상. 2014)를 서점에서 잠깐 훑고 왔다. 첫판에 비해 손을 좀 대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첫판 수준이 어디 간 건 아니었다. ㅡㅡ;;;

첫판 『이순신의 두 얼굴』은 괴악한 내용이 되게 많았지만, 본인에게 제일 황당한 부분은 '서면조사' 드립이었다. 귀찮으므로 다른 건 생략한다 원균옹호론자들은 이순신이 원균의 아들(원사웅)이 세운 공을 모함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 주장은 『선조실록』에 기록된 이덕형李德馨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다. 

德馨曰 "舜臣當初, 擠陷元均曰 '均欺罔朝廷. 以十二歲兒子, 冒屬軍功' 云, 而均則曰 '均之子年已十八, 有弓馬才'云.  兩人相詰, 則元均直而舜臣之說窮矣."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軍功에 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4일)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이순신이 정말 원균과 그 아들을 모함한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3년 전 김수의 말에 답이 있다. 

金睟曰 "元均·李舜臣相爭之事, 甚爲可慮. 元均不無所失, 而以不關之事, 漸至於此, 不幸之甚也." 上曰"以何事至此乎?" 金睟曰"元均, 以十餘歲妾子, 亦參軍功而受賞, 故舜臣以此不快云."
 김수金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이 서로 다투는 일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원균에게 잘못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 점차 악화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까지 되었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원균이 10여 세 된 첩자妾子를 군공軍功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것을 불쾌히 여긴다 합니다."
(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11월 12일)

이순신이 문제삼은 것은 10여세 된 서자가 군공이 있다고 해서 상을 받은 건데, 원균은 거기에 대해 적장자 원사웅을 내세워서 뭔소리냐고 응수한 것이다. (한마디로 원균이 엉뚱한 대상 세워놓고 이순신더러 허수아비 치기 하지 말라고 한 것. -_-;)
이덕형이 두사람이 대질했다고 했는데 그래서 고XX는 소설에서 판타지급 상상의 나래를 폈지 저 증언에는 장소와 시간이 전혀 없다. 결정적으로, 노량해전 후에 이덕형이 올린 장계에서 그 진실이 드러난다. 

左議政李德馨狀啓
"李舜臣之爲人, 臣不曾見面, 通一聞問, 未知其爲如何. 前日但聞元均說稱處事不是處, 意謂幹才則有之, 而純實勇敢, 則下於人矣. 及臣入本道聽海邊居民, 交口稱讃, 愛戴不已. 又聞其四月, 始入古今島, 而布置施措, 曲盡其宜, 纔過數四月, 民戶軍餉, 盛於舊年閑山島所有. 始知其才過人. 及劉提督無意於力戰, 而大事不得不全仰於水兵也. 臣頻數差人于舟師, 令李舜臣, 周旋機宜, 其盡誠徇國, 以死自誓, 營爲規畫, 儘爲可觀. 臣私謂'國家舟師之事, 主將得人, 可無虞矣.' 
不幸徑死鋒鏑,  前頭責委布置, 難得如此人者. 誠可痛惜矣. 報捷之日, 運糧夫丁, 得聞李舜臣身死, 雖無知老弱, 多有出泣而相慰者. 得此於人, 豈偶然哉. 且措置糧餉諸事, 料理甚廣, 一朝無主管, 必致蕩然散失. 特命新統制使, 盡心料理, 撫綏將卒, 俾不至渙散. 李舜臣爲國死職之狀, 無愧於古將. 褒奬之擧, 自朝廷, 別爲施行事."
啓下備邊司.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2월 7일)

이덕형은 이순신이 직접 만난 적이 없고 서면만 한차례 주고 받았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ㄱㅌㅎ은 이걸 가져다가 "대질 심문은 안했다네. 그런데 서면을 한차례 주고받았다고? 그럼 '서면조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어! 사건이 복잡해지는데....."라고 한 거다. (...)

당신 맘대로 상상의 나래해석하고 신나셨어요. -_-;

개정판에서는 뭐라고 고쳤나 봤다. 

《선조실록》의 상힐相詰(서로 비난함)이 실록 번역자의 실수로 전혀 다른 뜻의 '대질'로 둔갑했다. 온 나라 학자들이 이 '대질'이라는 단어에 얽매여 이덕형을 믿지 못할 자로 난도질하였고, 나아가 이덕형이 이순신을 모함하였다고까지 진도를 나갔으니 안타까움을 넘어 황당함을 느낀다. 
필자는 2004년 《이순신의 두 얼굴》에서 이덕형이 이순신을 서면 조사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1598년 보고서에서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라고 한 이덕형의 말을 믿었다. 그동안 이덕형을 난도질한 '대질'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상힐相詰로 밝혀졌으니 이덕형의 서면 조사는 확실시되고, 이덕형이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주장하던 기존 학자나 서적의 논리는 근거가 없게 됐다.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김태훈. 일상과이상. 2014) p.466~468)
(*서적 인용 부호가 본인과 다르지만 본문 그대로 입력했다. 밑줄과 굵은 글씨체는 본인이 강조한 것이다)

『선조실록』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는 맞는데-그러니까 '이순신과 원균이 서로 험담을 했는데, 원균의 말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궁색했다' 정도로 해석된다-아직 이 서면조사 내용을 못 버리고 있다.-_-;

1. 서면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언급 되어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순신에 대해 안좋게 보게 된 이유가 원균의 험담 때문이었다고 되어 있다. 
2. 김수의 증언으로 원균이 괴악한 논리로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이덕형이 올린 장계를 계속 읽어 보면 이순신과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이 뭔지 유추할 만한 대목이 있다. (본인이 밑줄로 강조한 부분)

어떻게 글을 읽고 해석하면 '서면조사'로 비약할 수 있단 말인가.......ㅡㅡ;;;

하나 더. ㄱㅌㅎ은 원균옹호론을 많이 버리긴 했지만, 약 빤 기운이 덜 빠졌는지 책 앞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략)......7년 전쟁에서 패장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원균이 그들과 유독 다른 점은 이순신과 불화한 패장이라는 점이다. 7년전쟁에서 이순신은 그 자체로 빛나는 존재였다. 전투 승리로 다져진 그의 이름은 확고했다. 우리가 굳이 패장 원균을 실제보다 더 끌어내려 이순신의 위대함을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김태훈. 일상과이상. 2014) p.89)

뭔가 잘못 생각하신 것 같은데, 원균은 실제보다 끌어내려진 것이 아니다. 졸장은 아니라고 해서 파 봤더니 실제로는 더한 놈이었다는게 나타난 경우이다. 파봤더니 막장 밑에 지하실이 있고, 지하실 밑에 마그마가......(그만) 그리고 이순신의 위대함을 부각하기 위해서 원균을 매도할 필요도 없다. 국가를 위해 복무하며 자신의 천재적 재능, 도덕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목숨을 바친 군인을 부각하는데 무능한 졸장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이순신의 가치는 그의 실제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 

李舜臣爲人忠勇, 且有才略, 明紀律, 愛士卒, 人皆樂附......(中略)......其丹忠許國, 忘身死義, 雖古之良將, 無以加也.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중략)......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7일자에 수록된 사관의 논평)

유기지는 역사이론 및 평론서인 『사통史通』에서 이렇게 경계했다. 

嗚呼! 逝者不作, 冥九泉, 毁譽所加, 遠誣千載. 異辭疑事, 學者宜善思之.
아아! 떠나간 사람들은 아득한 구천에 있어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는데, 한 번 역사가가 잘못함으로써 그들에게 가해진 비방이나 칭송은 멀리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라면 이상한 내용이나 의심스런 사실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야 할 것이다. 
(『사통』 내편 《채찬採撰》)

그런데 '신중하게 생각'하기 보다 '참신한 내용'부터 생각하고 쓰는 것 아닌가 싶다. 사실관계와 논리를 따지는 것이 순서인데 말이다............ㅡㅡ;;;
여하튼 여론 맞추어서 이순신 책 낸거 치곤 제대로 된 거 기대하면 안된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 

그래서 본인은 8월에 컴백하는 에이핑크의 오하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응?)

덧글

  • 을파소 2014/08/01 17:23 #

    이 부분은 다음 포스팅 소재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먼저 가로 채셨네요.(응?) 상힐에 대한 김태훈의 해석을 따르더라도 바로 뒷부분의 내용, 그리고 언급하신바와 같이 종전 후 이덕형 스스로 한 발언을 보면 문제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진 않죠. 김태훈은 '이덕형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옳은 내용이라는 게 아니라 '이덕형이 원균의 모함에 속아 이순신을 오판했다가 나중에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가 맞는 것일테죠.

    덧붙이자면 이덕형은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을 오판하던 시점에서조차 도덕성에 대해 오판하던 것이지 그래도 삼도통제사는 이순신이어야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원균을 수군으로 복귀시키자고 할 때 그럼 경상좌수사로 임명하자고 하여 선조의 체면을 어느 정도 세워주면서도 이순신과 충돌하지 않게 하는 절충안도 제시하였으니까요.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요.
  • 연성재거사 2014/08/01 19:17 #

    말씀대로 '이덕형이 원균에게 넘어가 이순신에 대해 오판했다가 나중에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가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상좌수사가 사실상 이름만 내건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감안하면 이덕형의 제안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왕이 말을 안들으니......ㅡㅡ;;;
  • PKKA 2014/08/01 17:40 #

    그러니 우리는 대중교양서따윈 버리고 전문연구서를 읽는것이 좋습니다.
  • 연성재거사 2014/08/01 19:15 #

    마구 버리면 안됩니다. 이렇게 일용할 포스팅 거리를 주는데.......(응?)
  • 무갑 2014/08/01 22:25 #

    한국의 갑주에 대한 분야 자료모을때 그런거 많이 느꼈습니다.

    책은 대중서는 박XX라는 환빠교수가 쓴 책 외에는 없다시피하고(내용은 언제나 기-승-전-크고알흠다운고조선-_-;), 전문 서적은 아주 극소수 있기는 한데 시중에 파는게 없어서(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 아니면 보기 힘듭니다. 그나마 문화재청자료는 pdf로 받아 볼 수 있습니다. ㅜㅜ) 관련 논문이 포함된 학술지와 석-박사 논문까지 모조리 뒤져야 됩니다..ㅜㅜ
  • 연성재거사 2014/08/01 23:08 #

    무갑/ 이건 학계가 좀 반성할 측면이 많습니다만, 댓글로 이야기하기엔 너무 깁니다.(...)
  • 행인1 2014/08/01 22:23 #

    요즘은 '해석'을 '내맘에 맞게 읽기'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듯 합니다.-_-;;
  • 연성재거사 2014/08/01 23:06 #

    요 근사이에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게 비극입니다.ㅜㅜ
  • bergi10 2014/08/01 22:48 #

    충무공의 후손들은 구한말까지 대접받으며 살았었는데 원균의 후손은....

    두 인물만 놓고 볼게 아니라 그 후손들을 대한 조선 조정의 태도만 봐도 감이 좀 오지 않을까 싶네요.
    (구한말에 매관매직하던 충무공의 후손도 결국엔 그만한 권력이 있었으니...)
  • 연성재거사 2014/08/01 23:06 #

    그냥 당대의 행적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 지녀 2014/08/02 22:56 #

    충무공의 별명이 괜히 치트공이 아닌데!(...)
    사실 말도 안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13척으로 133척(혹은 300여척)을 이기는 거나,
    그 짧은 시간에 해군을 부활 시키는 거나...

    전술, 전략, 행정면에서도 완벽했으니, 인간답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거기다 충신이기까지!
  • 연성재거사 2014/08/03 00:23 #

    실로 하늘이 낸 인물.......(-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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