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겸 방명록 by 연성재거사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論語』 《顔淵》)

새해를 맞아 방명록 및 공지판 새로 올립니다. 2015년 지나도 한동안 계속 상단에 위치할 겁니다.

1. 이곳 주인장이 덕후이기 때문에 덕후는 환영입니다. 저는 역덕 겸 핑덕이지만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에 소덕, 카덕, 걸덕 등등 모두 환영입니다. 
단, 환덕을 필두로 한 사이비학문 덕후들은 조용히 다른 곳에 가서 노실 것을 권합니다. 

2. 로그인 후 댓글 가능 원칙 하에 악플 및 광고댓글은 절대엄금입니다. 이런 부류의 글들 중 정도가 심한 것들은 경고없이 삭제합니다. 이것이 주인장의 권력 우훗.

3. 허가없이 무단으로 글 퍼가는 행위는 하지 마십시오. 정 내용을 공유하실 거면 링크/핑백/트랙백으로 대신 하시고, 댓글로 제가 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본인이 핑덕인 만큼 본 블로그는 에이핑크(Apink)를 응원합니다 적당히 해 이 미친 놈아!

그중 최고는 막둥이 겸 여신님!!!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뱀발: 막짤 둘은 수시로 업뎃 가능. (??!)

연재하는 글들(변경 가능) by 연성재거사

제가 블로그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개인적인 글쓰기이기 때문에 간혹 주제가 잡히면 연재글도 올리고 있습니다. 방명록 새로 올리는 김에 방문하는 분들 편의를 위해 모아 놓았습니다. 비록 연재글을 많이 쓰지는 않지만, 정리해 놓으면 원하는 주제로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재 목록을 올립니다.

-임진전쟁(1592~1598) 당시 조선수군의 전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순신의 해전술을 중심으로 분석하려고 연재하는 글입니다. 아마 제일 업데이트가 뜸하게 올라가는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_-a

-『징비록』의 내용을 초고와 비교하면서 내용이 어떻게 변했는지 비교하고 해석을 달은 내용입니다. 처음에 연재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꽤 여러편이 모여서 이 주제의 글이 많아져서 태그로 체계를 묶어버렸습니다. 참고로 "Book of Corrections"는 2002년 출간된 영역 『징비록』의 제목입니다. 
(영역본의 서지사항은 『Book of Corrections: Reflections on the National Crisi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1592-1598』 written by Song-Nyong Yu, translated by Byonghyon Choi. California University Press. 200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적戰積을 다루고, 그가 어떻게 세계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는지 다룬 포스팅입니다. 해당 언어로 원 사료를 읽지 못하는 제 자신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유념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당나라 측천무후 시기 내준신이 함정수사 메뉴얼-_-로 적은 『나직경』을 번역한 연재입니다. 진위 논란도 있고 텍스트 자체도 괴악합니다만, 세상의 악을 이야기하면 善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에 시도한 결과입니다.


※ 이 글은 항상 방명록과 더불어 상단에 놓겠습니다. 제가 판단해서 내용 변동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반영할 것입니다.

임진왜란기 강화회담 다시보기(1) by 연성재거사

흔히 임진왜란을 7년 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기간 중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게 7년전쟁이라는 표현이 과장이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나머지 기간은 명과 일본이 강화협상을 벌이는 와중에 간간히 접전이 벌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강화협상의 전개에 관해서 흔히 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벽제관 전투를 계기로 명은 일본과의 강화를 모색하게 되고, 일본 역시 조선에서 벌이는 대외원정의 전세가 이전같지 않게 되면서 양측은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는 시도를 한다. 선조는 이를 반대했지만 사실상 무시(되면서 동시에 배제)되었다. 문제는 양측의 요구조건이 너무 달랐다는 것이고, 이 말이 안되는 협상을 되게 하기 위해 양측 실무자였던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짜고 국제사기극을 벌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관련부분

하지만 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나 다름없는 국제사기극은 히데요시 책봉식에서 그대로 폭로되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한 히데요시가 조선의 4도라도 얻어내기 위해 재침을 강행한 것이 정유재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자세히 뜯으면 무언가 말이 안되는 구석이 많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선, 심유경과 고니시 두 사람이 공모한다고 해서 명-일본의 모두를 속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가간에 협상을 하는데 과연 전권대사 한두명의 공모로, 모든 것이 은폐된 상태로 4년씩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국가간에 협상을 하면 최고 담당자 뿐만이 아니라 많은 실무진들이 들어간다. 기존의 설명대로라면 이 사람들이 전부 심유경과 고니시의 공모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되는데, 이런 국제사기극에 같은 배를 타고서 심장의 고동을 꾹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차라리 중간에 사기극을 폭로해서 자기가 살고보자는 생각이 안 들을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재구성된 이야기에서 간과된 것이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다.

내가 니들한테 재수없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거든?

히데요시는 아시가루에서 시작해서 최고권력자로 올라간,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난세의 시기에 그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과 상황에 대한 파악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과연 이런 사람이 고니시의 말만 듣고 강화회담이 흘러가게 놓았을까? 애시당초 그런 사람이었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히데요시는 강화회담의 진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요구사항을 바꾸어 처음에 요구했던 조건들을 대부분 포기했다.

기존의 강화회담에 관한 서술은 명과 일본 모두 서로의 세계를 몰랐다는 것까지는 설명해주지만, 문제는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정황상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임진왜란기 강화협상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국제사기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조약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어느 한쪽이 멸망하거나 철저하게 패배한 뒤에 체결되는 경우이다. 이때 체결된 조약은 종종 미래의 전쟁을 불러올 씨앗이 되기 마련이다. 승자가 패자의 복수능력을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으면서 이들에게 모욕을 주고 분노를 사기 때문이다.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강요했던 조약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두번째 유형은 전장에서 승패가 결정났는지 여부를 떠나서, 당사자들이 전쟁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비용과 위험, 평화가 주는 미덕도 잘 알게 되는 경우 그 분쟁(대개는 장기전)을 끝내는 조약이 있다.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런 조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조약 내용이 군사적/정치적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하며, 양편 모두 조약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해야 한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임진왜란의 강화회담은 후자 쪽에 가깝다. 그리고 양측을 오가면서 4년동안 진행이 되었다는 것은 참전 당사국들이 나름대로 진지하게 전쟁을 끝낼 의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양보 못하는 지점이 있었고, 여기서 타협을 보지 못하면서 정유재란이 벌어졌다. 그리고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막짤은 오랫만에 막냉이 고라니로 마무리 ㄳ

거북차(龜車)가 말하는 조선의 한계 by 연성재거사

최근 번역된 이덕리의 『상두지』를 보면 구거(龜車)를 고안해서 제시한 대목이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龜船)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수레에 장갑과 화력을 갖추고 창칼을 갖추어서 적진을 돌파하는데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이덕리만 구거를 고안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기록상으로 구거의 존재가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1630년 1월의 기록으로, 괴산의 진사 권대신이 적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적어냈고 직접 구거를 만든 것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인조는 나중에 보겠다고만 했다. 그 뒤에 한동안 기록이 나오지 않는 걸 봐서는 실제로 채택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효종 3년 1월에 다시 등장한다. 전 주부 박산남의 상소를 보고 전라병사 구인기가 제작해서 실험해보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구거도 실험만 하고 폐기된다.
권대신과 박산남의 구거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대개 이름이 비슷한 이순신의 거북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걸 봐서는 장갑을 씌우고 화력을 갖춘 수레라는 형태였을 것이다. 실험만 하고 폐기된 사유를 자세히 적은 것을 보면 제작기간이 오래걸린데다-3개월 걸려서 겨우 1대 만들었다고- 실제로 끌어보니 70명을 동원해야 하는데도 언덕에 구애받고 진창에 빠지고 해서 하루 10리도 가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아이디어 자체는 적의 진영을 돌파하려는 전차지만, 막상 만들어보면 끌고다닐 수 없는 애물단지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덕리의 고안대로 만들었으면 쓸만 했을까? 내 생각에는 마찬가지로 애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효종 때 애물단지가 된 구거를 밀었다는 인원이 70명인데, 이덕리가 고안한 설계에는 끄는 사람이 10명(또는 소 2마리)라고 되어 있다. 70명도 처음 설계와는 달리 정작 밀어보니 인원이 늘어난 숫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덕리의 구거도 실제로 실험해봤다면 비슷했을 것이다.
사실, 장갑과 화력을 갖추고 적진을 돌파하자는 생각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아니, 120여년 뒤 그런 물건이 나왔고, 개량과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도 전장을 굴러다니고 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이런 물건이다

그러나 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장갑과 화력 뿐만 아니라 기동력이 필요한데, 조선에서 구거를 설계했던 사람들은 기동력을 생각하지 못했고, 실험에서 문제점은 알았다고 해도 기동력을 부여할 엔진을 만들 개념도 기술도 없었기에 그냥 폐기하게 되었다.
박산남의 구거를 실험해보고 폐기한 것이 1652년이고, 이덕리가 『상두지』 서문을 쓴 것은 1793년으로 약 140년의 간극이 있다. 그 사이에 주목할 만한 발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정확하게 장갑과 엔진을 갖추고 참호를 돌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탱크가 서구에서 등장했고, 20여년 후에는 전격전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평화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조선이 절대 국방을 등한시하거나, 국방기술이 쇠퇴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국방문제를 연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조선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던 다른 국가들도 비슷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 도착할 때에 그 격차는 극복이 가능한 수준을 넘는게 문제였다는 결과가 우울한 것일까, 아니면 제한된 세계에서 이루어내는 발전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진실이 더 아픈 것일까.

막짤은 오랫만에 막둥이 하빵이로 마무리 ㄳ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확정 by 연성재거사

서강대 박사과정 입학이 확정되었습니다.

원래는 수입원(=직장)을 얻은 다음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게 되어서 진학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취직도 급해졌다는-_-;;;;;;;;)

개인적으로는 그냥 본래 다니던 학교로 다니고 싶었는데, 전공문제도 있고 지도교수님 정년 문제도 있고 하다보니 학교를 바꾸게 되었습니다.ㅠ.ㅠ

이제 2막이 시작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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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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